그런 책이 있다. 어떤 주제를 다룰 것인지 알기 때문에 읽기 전부터 두렵고 걱정이 되는 책.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등장인물에게 언제 그것이 닥칠지 몰라 읽는 내내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게 되는 책. 조금만 더 읽어서 그것이 나오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어느새 정이 든 등장인물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외면할 수 없는 책. 최진영 작가의 <이제야 언니에게>는 내게 그런 책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포털 뉴스 기사 제목에서 너무 흔해져버린 단어들-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 언제부터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많았나. 원래 많았는데 인터넷 덕에 이렇게 흔한 일이 되어버렸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피하고만 싶어진다. 내가 겪은 일도 아닌데 너무 두렵고, 또 두렵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들의 마음을, 생각을, 괴로움을, 고통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도, 아주 조금도 그들을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그 사건 자체일테지만, 그보다 더 한 폭력은 피해자들에게 추측성으로, 비자발적으로 씌워지는 사회적 편견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나 역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들에게 '꽃뱀', '밝히는 x' 등으로 사건의 본질을 왜곡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겁다. '여자애라서' 나 역시 존중받지 못한 때가 있었을텐데 나 스스로도 '여자애라서'라는 생각에 나를 가둔 것은 아니었나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 사회에서 비난 받아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우리는 왜 이 당연한 사실을 너무 쉬이 잊어버리고 있을까. 우리는 왜 그럴까.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화는 대체 누구를 위한 합리화일까. 잔인한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가해자의 편에서 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그것은 아마 몇 천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작가님의 편지에서 제야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과연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나 역시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조차도 제야에게는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이런 생각부터가 제야를 상처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야만의 길을 택한 것이 대견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다. 이 마음이 내가 제야에게 보내는 편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