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우크라이나에 애인이 있고, 샹젤리제에도 애인이 있건만 그는 혼자였다. 그의 생애 어느 때보다도 더 혼자였다.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내면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분명하게 깨어났다. 이 생명력 넘치고 낙관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인간이 전에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으니 바로 두려움이었다. 신비스럽고 헤아리기 힘들고 여러 가지 뜻을 담은 두려움. 모든 힘을 다해도 자신이 스스로 시작한 엄청난 작업을 완수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 너무 일찍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일에 빠져서 진짜 삶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P450
발자크에게 있어서 바라보는 것은 곧 꿰뚫는 것이며, 배우지 않고도 알고, 마법을 통해 알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P457
그의 소설들이 해마다 더 높은 수입을 올리고 엄청난 전집이 준비중에 있고, 그의 문학적인 지위가 유럽적인 수준에 오른 지금보다. 과격한 자신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P464
그러나 질서를 원치 않는 것이 그의 삶의 깊은 의미였다.- P465
발자크의 생애에서는, 예술작품에서 모든 상황을 빈틈없는 눈길로 조망하고 꿰뚫어보던 그 두뇌가 현실에서는 어린애처럼 믿기 잘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어진다는 이 역설적인 현상이 징그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되풀이된다.- P472
예술가로서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동일한 상황을 실제 삶에서 부딪치면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가르칠 수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P473
<파시노 칸>이라는 허구의 상황에서는 보물 찾는 사람을 바보라고 여겼지만, 지금 자신이 이런 생각을 지닌 바보가 되고 만 것이다.- P476
비극적인 아이러니지만 그의 모든 계획들. 인쇄업, 활자제조업, ‘자르디‘의 부동산 사업 등에서 발자크는 계산만은 올바르게 했다. 그의 직관적인 눈길이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부자가 되려고 했던 계획을 통해서 남들은 정말로 부자가 되었다.- P481
발자크의 후각은 언제나 옳았다. 그러나 이 후각은 언제나 예술가로서의 그에게만 호의적이었고,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려고만 하면 언제나 그를 잘못 인도하였다. 발자크가 자신의 환상을 작업으로 바꾸면 그 환상은 그에게 수십만금과 그밖에도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가 환상을 돈으로 바꾸려고만 하면 빚만 쌓이고, 그 결과 수십 배, 수백 배의 노동이 대가로 돌아왔다.- P482
발자크의 소설을 특징짓는 것은 위대한 장면들이 아니라, 인물들이 천천히 변화하는 과정이며, 그들이 환경 및 풍경과 연결되는 과정에 있었다.- P494
발자크의 경우에 실패는 언제나 두 배, 열 배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졌다.- P499
자르디 건축, 누라의 은광산, 희곡 생산. 이 세 가지 엄청난 멍청이 짓은 마흔 살 먹은 남자가 스무 살 때나 서른 살때나 다름없이 세상사에는 순진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멍청한 짓들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차원이 더 커지고, 더욱 환상적이고, 충동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악마적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거리감을 통해서 분명한 시각을 얻기 쉬운 우리에게는, 존경을 모르는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눈먼 그의 행동만 보느라 그의 명석함을 잊어버린 일과, 그의 파괴적인 멍청함만 쳐다보느라 그 창조적인 작품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P506
그가 삶을 진행할수록, 생존이 그를 가혹하게 뒤흔들수록 발자크는 더욱더 사실주의자가 된다.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점점 더 불신을 품은 눈길로 그는 상황과 관계들을 꿰뚫어본다. 그리고 점점 더 예언자적인 인식으로 전체의 맥락을 조망한다.- P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