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새치는 집안의 유전이었고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는데도, 지난 삼 년 동안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흰머리를 보며 그녀는 새삼 놀라곤 했다.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자학적인 충동이 일어서 염색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드문드문 희게 빛나는 커트 머리가 아직 젊음이 깃든 그녀의 얼굴괘 대비되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사실이었다. 상처에도 약간의 메이크업은 필요한 법이니까.- P58
우리 여자들 모두 가슴에 소화되지 못한 아픔 하나쯤 품고 살잖아요?- P59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P64
눈 내리는 연말의 밤거리를 통과하면서 은화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감각했고, 그러는 동안 천천히 비참해졌다.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P81
상처를 발화하는 건 얼마간 수치를 감당하는 일이다. 제때 처치하지 못해 괴사한 피부나 병으로 도려낸 가슴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수치를 겪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필사적으로 저항해 왔다는 걸 이제 알겠다. 세간에 떠도는 치유와 극복의 서사에 수동적으로 편입되느니 차라리 나만의 절망으로 고꾸라져 내파되기를 바랐다는 것도.-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