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내리는 시간이다. 라고 메이지가 이은에게 말할 때, 이토는 그 말의 크기를 어린 이은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짧게, 간단히 말하는 미카도의 위엄에 숨이 막혔다.- P14
메이지는 말과 말 사이에 적막의 공간을 설정했다.- P14
동양과 서양, 대양과 대양을 연결하는 이 문명사적인 항구의 옛 등대를 이토는 거룩히 여겼다.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기호로 연결해서 재편성하는 힘의 핵심부였다. 신호로써 함대를 움직이고 신호로써 대양을 건너가는 기술은 바로 제국이 갖추어야 할 힘의 본질이라고 이토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P16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P18
상해에 돈을 가진 자들은 더러 있었으나 뜻을 가진 자는 없었다.- P24
아버지가 죽자 아들이 태어나는 질서는 삶과 죽음이 잇달음으로 해서 기쁘거나 슬프지 않았고, 감당할 만했다. 모든 죽음과 모든 태어남이 현재의 시간 안에 맞물려 있었다.- P26
아이가 젖을 자주 토해서, 김아려의 몸에서 젖 삭은 냄새가 났다. 아이의 몸과 어미의 몸이 섞인 냄새였다. 냄새는 깊고 아득했다. 안중근은 그 냄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은 한 생명의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되는 일의 근본인 것 같았다.- P27
길에서 빌렘은 사람들과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과 체취를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넣었다. 그렇게 각인함으로써 빌렘은 사람들에게 건너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P29
오래전에 세례를 받던 때의 기쁨은 때때로 안중근의 마음속에서 솟구쳐올랐다. 그때, 멀리서 빛이 다가왔고 안중근은 밝아오는 영혼의 새벽을 느꼈다. 그때, 안중근은 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P32
쇠가 이 세상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길이 열리면 이 세계는 그 길 위로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한번 길을 내면, 길이 또 길을 만들어내서 누구도 길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힘이 길을 만들고 길은 힘을 만드는 것입니다.
순종이 말했다.
-세상의 땅과 물을 건너가는 길도 있지만, 조선에는 고래로 내려오는 길이 있소. 충절과 법도와 인륜의 길이오.-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