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과 대부업의 밀착 관계: 어음과 거래 신용도의 모순
상거래에서 신용은 상품 생산자 간, 그리고 은행의 대부에서 발전한다. 여기서 일정한 약속을 대가로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어음이 요구된다. 어음에 의한 계약은 일반적인 상품의 대가에 대한 매매나 그 순환 수준과 달리, 특히 대규모의 무역 거래에서 어음 지불 형식을 이용하게 된다. 어음의 종류로는 크게 진정 어음, 가공적 융통 어음, 환어음, 은행 발행 어음 (21일 만기 어음) 등이 존재한다. 어음의 종류별 특성에 따르면,
· 진정 어음은 물건을 매각한 뒤, 대금을 특정 기금에 치르기로 약속한 증서이다.
· 융통 어음은 실제 상품의 이동이 아닌, 통화 창출 및 자금 마련 목적을 위해 발행되는 어음이다.
· 환어음은 산업 신용을 위한 대표적인 어음으로,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특정 기일에 제3자 또는 그 자신에게 지불하는 증서이다.
· 은행 발행 어음은 신용도가 낮은 개인 어음 대신, 공신력이 높은 은행에서 발행하는 어음이다.
이러한 어음들은 대부를 통해 본래 화폐 신용도를 높이거나, 신용 거래에서 효율적인 매매 수단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영국의 런던에서 1847-1848년 사이에 중대한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Ⅳ세는 대대적인 철도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8개 주의 의회를 통합하여 '연합 의회'를 소집한다. 부르주아 시민 대표들은 '헌법 제정과 예산 심의권에 자신의 자금을 대부할 수 없다며' 국왕과 정면으로 충돌하였고, 결국 프로이센은 처음 입헌제를 시행하게 된다. 1846년 이전부터 대규모의 흉작으로 인해 베를린에서는 감자 폭동이 일어났고, 1847년 봄, 베를린에서는 식량 가격이 폭등한다. 굶주린 농민들은 상점을 약탈하는 등의 소요 사태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동원되어 결국 진압된다.
차티스트 운동: 노동자의 참정권
1847년은 흉작 및 과잉 생산으로 인해 서서히 경제적 파국이 가시화된다. 결국 대규모 경제 공황이 발생하고 노동 운동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빌헬름 Ⅳ세가 추진한 철도 건설 정책의 철도 투기 거품은 꺼졌고, 이 여파로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도 바닥나면서 수많은 은행과 상사가 연쇄적으로 파산하였다. 일국의 정부가 은행법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사태까지 일어난 것이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공장 내 여성과 어린이의 하루 노동 시간을 10시간 노동법으로 제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경제 위기로 인해 실업자가 계속 일어나자 노동자들의 참정권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1848년 대규모 청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1847년 동시대에 마르크스·엥겔스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런던 비밀 결사대였던 '의인 동맹'의 명칭을 전환하여 '공산주의 동맹'을 공표하게 된다. 이들의 소속 인원들은 치열한 토론과 논의 끝에 이들에게 강령을 작성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런던과 브뤼셀을 오가며 집필에 몰두한 결실이 바로, 1848년 2월, 『공산당 선언문』으로 발표된다. 이 사이 맑스는 프루동에 대해 전면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1847년 여름에 출판한다. 이들은 브뤼셀 민주 협회의 활동도 병행하면서 국제 혁명의 기틀을 겨우 다지는 중이었다.
그 다음해인 1848년은 곧바로 반동의 해였다. 독일에서 2월 혁명이 발생했음에도, 군부에 의해 좌절되었고, 맑스 역시 주 연락처였던 브뤼쉘에서 추방 당한다. 그는 영국이 아니라, 이제는 프랑스로 이동하여 파리에서 공산주의 동맹의 중앙 위원회를 재구성하게 된다. 독일 혁명이 좌절되었기에, 1848년 중반-말에는 6월부터 『신라인 신문』 편집장으로 연재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활동을 병행하였고, 『임금 노동과 자본』을 연재하였다. 반혁명이 대두되던 분위기에 따라 맑스 역시 국가 법정에 소환되어 자신의 무죄를 항변해야 했다.
1847: 경제 공황 사태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47년의 경제 공황은 신용의 상부 구조가 급격하게 팽창하고, 실제 거래 없이도 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예금을 투기하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영국은 동인도 (현 인도)와의 식민지 무역에서 막강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상품이 선적되기도 전에, 선하 증권을 담보로 자금을 일시에 회수하는 등 실체 없는 자본들이 시장 곳곳에 등장하기 출현하였다. 처음에 어음은 지불 보증 및 권리의 양도를 위한 이서를 거치며 자본가들이 막대한 화폐를 축적하고, 소유권을 이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하였지만, 공황기에는 결국 이 어음으로 인해 금융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며 아무리 공신력 있는 은행 어음이라도 현금화 (할인)가 거부되면서 '가공 자본'은 소멸하게 된다.
은행업의 본질은 이러한 상품 거래 및 매매로부터 순환되는 화폐 자본의 집중과 관리가 목적이지만, 실제로는 어음과 대부 등과 같은 대출 상품을 토대로 자본가 및 사업가 등에게 예탁 및 판매하여 분산된 유휴 화폐를 대부 자본으로 수취시킬 수 있게 된다. 가공 자본의 창출로 인해 은행은 실제 예탁된 금이나 현금 등의 현물 신용도를 높이고, 산업 자본가의 저축금, 일반 대중의 저축, 심지어 소득 중 일부 유휴 자본까지 예금 및 납입된 자금까지 모두 흡수하여 막강한 부의 원천과 화폐적 위력을 자랑하게 된다. 은행은 실제 예탁된 현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어음 할인, 당좌 대월 등)을 제공하며, 이 과정에서 실체가 없는 화폐, 즉 '가공 자본'을 추가로 형성한다.
1847년은 이러한 신용이 저렴하고 입수가 용이하였기에, 자본가들은 가용 자산을 상회하는 무리한 투매를 거행하며 자신들의 사업을 확장시켰으며 1840년부터 '면공업'의 발달로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 착취로부터 마련한 본업 자금를 토대로 사업의 확장 및 철도 투기에 돌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부족한 운영 자금이 발생하면 다시 은행 신용 (어음)에 의존할 수 있는 취약한 경제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국가적으로 부도가 났음에도, 영국과 인도 간 별도의 상품 거래가 없이도 자금 마련을 위해 어음을 발행하는 수법 (가공적 융통 어음)이 자주 일어났고, 당시 무역 시차를 이용한 상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담보 대출을 받는 등 고도의 신용 연쇄가 일어났다.
결국 실제 경제 (흉작, 과잉 생산 등)의 문제가 야기됨에 따라, 신용 체계는 즉각 마비되었고, 경제적 합리성은 득실 계산에 따른 높은 이자율 대비 유동성 (현금) 확보에만 몰리는 각자도생 양상도 나타나게 된다. 이는 영국의 생산물과 인도의 공급물이 서로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포화 상태를 야기하여 생산품 가격을 붕괴시켰고, 이는 신용으로 그나마 버티던 은행의 가공 자본에 따른 연쇄 폭발 현상으로 이어진다. 당시 은행업자였던 『상업 불황 기밀 보고서』의 리삼, 투크, 길바트 등이 이러한 문제를 진술함에 따라 '신용의 문제'가 대두된다.
결론적으로, 신용 제도는 생산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지만, 동시에 생산과 소비의 한계를 기만적으로 확장하며 공황의 파괴력을 완화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킨다. 이는 시사적이지만, 1847년부터 서서히 발생한 '경제 공황'의 실체가 순환되어 현대에도 은폐되어 반복된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