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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zaie의 독서일기
  •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 윤해동
  • 31,500원 (10%1,750)
  • 2022-05-31
  • : 283

반복적으로 언급하지만 '공교육에서의 한국사'가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역사는 아주 광범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식민지의 역사는 늘 일제의 지배와 조선(한국)의 저항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근대 국민 국가 수립 운동', '민족 운동'이라는 대주제명으로 전개되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동시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윤해동, 『식민국가와 대칭국가』, 소명출판, 2022는 그러한 통념을 깨버리는 전문서적입니다. 우선 이 책은 근대사를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전제는 '식민지근대'입니다. 그는 예전부터 "근대란 원래 세계 체제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한국적 근대라는 문제의식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휴머니스트, 2007, 19쪽.) 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근대는 식민지근대'가 되는 것입니다(21쪽.). 

이러한 시각으로 조선총독부의 국가론적 성격을 분석합니다. 우리는 총독부라고 하면 단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식민지를 억압한 권력체라고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세하게 알거나, 그 정체성을 규명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6쪽.).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중국가, 식민국가, 대칭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합니다.

이중국가는 대한제국과 통감부가 병존하던 시기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대표적인데, 헝가리 왕국은 헌법과 의회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군사, 외교와 재정을 공유하고 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임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는 고종과 순종이 존재하였고 군대와 경찰도 있었다. 하지만 러일전쟁 개전과 함께 잠식적으로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8월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한일보호조약,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 1906년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1대 통감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1907년 7월 제3차 한일협약(이른바 "정미조약")을 차례로 체결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병운동을 제압하고, 군대, 경찰, 사법기구를 접수하며, 고종을 퇴위시키고 통감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후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그야말로 식민국가가 됩니다. 총독은 천황에 직속되나, 본국의 내각의 직접적 통제를 받지 않고 식민지의 행정, 입법, 사법 등 종합행정권이 부여된 '소천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국 정부의 조직을 토대로 조선주차군과 헌병경찰(1910년대 무단통치의 주류였던 경찰과 헌병경찰의 약 58%가 조선인이었다. 다만 최말단인 순사보와 헌병보조원으로 머물렀다(210~212쪽.).)을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1929년 척무성, 1942년 대동아성이 설치되면서 본국의 중앙정부와 제국의회의 직간접적 통제를 받았고, 이왕직(천황가의 2단계로 왕공족으로 우대하나, 조선왕조의 상징공간을 박물관이나 동식물원을 설치하여 신성성을 떨어뜨리고, 고종과 순종은 궁에 유폐되어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었다.), '조선군(1904년 한국에 주차하는 일본군을 '한국주차군'이라고 명명하고, 1918년부터 '조선군'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들은 조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자, 3.1 운동 진압, 중국침략을 위한 군대로 변모되었고, 1938년 지원병제도가 도입된 이후 1944~1945년 사이에 학병과 징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도 동원되었다. 그 중에는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회적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차별에서 탈출한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306~318쪽.). 또한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은 오사카 루스(留守) 제4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쓰카자키 마사유키(塚崎昌之), 신주백 역, 「오사카성 부근에 남겨진 근대 한일 관계의 상흔」, 『역사비평』 83, 2008.) 참고.)', 조선은행(엔블록을 견인하는 국제투자기관으로 역할을 다하며 중국 침략에 대한 군사비 충당을 위해 화폐 증액발행을 하였다.) 등에 대해서는 감독권이 없었습니다. 한편 지방행정제도에는 도제를 도입하여 총독 중심 중앙행정체계를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서 도평의회 혹은 도회의원의 약 70~75%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조선인 교육문제, 생활개선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249~252쪽.). 이렇게 식민지 경영 방법을 모색하는 데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에 또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국가 조선총독부는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식민지 통치라는 측면에서 주권 없는 근대국가였습니다(372~380쪽.).

이러한 조선총독부와 대치하는, 즉 대칭국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입니다(이하 임정). 임정은 3.1 운동 이전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이 국민주권설과 공화정에 기반한 임정 수립 논의가 있었기에 쉽게 수립될 수 있었고, 명목상으로 국내의 한성정부를 계승하되, 실제로 초기 상해임정과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성립되었습니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식민지배가 종결될 때까지 5번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인민주권의 원칙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점유하고 있는 영토가 없고, 국제적 승인을 받진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임정은 식민국가를 통해 국민국가를 상상하고 학습하였기에 '이념상의 정부'로서 저항성을 담보한 '상상 속의 국가'인 셈입니다. 즉 반주권(半主權)을 보유한 반국가(半國家)라는 것입니다(355~372쪽.).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될 때 일본은 홋카이도(1869), 오키나와(1879)를 병합하고, 청나라 중심의 중화질서는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청, 이중국가로서의 대한제국, 제국 일본으로 정리되고, 1930년대에는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던 분열된 중국, 이중국가로서의 만주국과 식민국가로서의 조선, 그리고 그들의 '모국'인 제국 일본이라는 혼성적 결합으로서의 동아시아형 국가간체제가 탄생하였습니다. 여기서 제국 일본은 내지와 외지로 구성되는 국내적 '공영권(共榮圈)'을 핵으로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상의 전지구적 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풍경이자 다성음악이(405~406쪽.) '공교육으로서의 한국사'에서 전개되어 학생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넓은 역사 인식으로부터 세상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역사학의 과제이고, 시민들에게 공유되어야 할 역사상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 다 좋았지만... 아쉽게도 잘못된 점이나 오타가 있었습니다. 이는 평점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됩니다. 제가 지적한 것은 소명출판사에 신고를 하였고,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38쪽: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사진과 설명 불일치. -> 반대로 되어 있어야 함.

399쪽: “달리진다” -> “달라진다” 수정 필요.

405쪽: 특별한 의미가 있으면 “「」”를 확실히 하거나, 아니면 “」” 삭제 요망.

"‘선진국‘ 한국의 바탕에는 민족주의의 두터운 거품으로 싸여있는 식민지가 깊숙이 그리고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를 직시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식민지 경험은 한국인만이 치러야 했던 예외주의적 고난의 사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6쪽.)

"궐위의 시대 곧 정치와 권력이 서로 어긋나 있는 시대, 국민국가가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시대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전지구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화된 주권이라는 이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자유로운 세계의 만민은 지구적 정의라는 이상과 더불어 주권적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383쪽.)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전지구적 식민지근대가 만들어내고 있던 이런 국가의 풍경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국가 너머를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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