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 결정의 날 헌법재판소 이정미 소장의 낭랑한 결정문을 듣고 있던 장소는 아르바이트 중이던 편의점이었다. 일하는 장소다 보니 소리를 크게 틀 수 없고 스마트폰 스피커에 귀를 밀어야 들릴 수 있는 음량으로 탄핵심판 최종선고를 시청했다. 그러나,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증거는 없습니다 등 인정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내용이라 불안해하며 중 설마... 설마... 가슴을 졸였다. 느리게 돌아가던 시계는 분위기 반전과 함께 급 빨리 돌며 듣고 싶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순간 내 머리를 스쳐 간 새초롬한 희열이라는 감정은 좀처럼 잊지 못할 것이다.
탄핵 당시 국민을 그렇게까지 분노하게 한 이유는 뭘까. 많은 이들이 사적으로 친한 수준미달 언니에게 국정을 몽땅 맡긴 것을 꼽는다. 최순실의 개입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이렇게 개탄했다. ˝어떻게 최순실 같은 사람에게.˝ 더 적나라하게는 ˝어떻게 그런 년에게!˝ 국민은 더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니까. 국민의 대표는 나의 대표니까. 국민의 대표가 최순실의 꼭두각시였다는 말은 내가 최순실의 꼭두각시로 놀아났다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더 열심히 분노해야만 했다. 최순실 같은 사람에게 농락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이 책은 비교적 쉽게 쓰인 입문서로 모멸감, 모멸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언뜻 추상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모멸‘의 뜻을 모욕과 멸시(또는 경멸)가 함께 섞인 단어라고 설명한다. 상대를 무심코 경멸해서 모욕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국인들은 ˝자존심 상해.˝라고 자주 말한다.(치욕, 경멸, 무시, 동정 등 모멸의 대부분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1. 한국인은 남에게 모멸을 자주 준다. 2. 한국인은 모멸을 민감하게 반응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책의 107P를 보면 저자가 참 재밌는 부분을 설명한다.
어휘들을 살펴보면 한국어의 한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부정적인 정서를 가리키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의 느낌을 한국어에서는 매우 다채롭게 표현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참고
(104-106P)
한국인은 얼마나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조적인 억압을 받았기에 이렇게나 다채로운 억울한 표현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주부들에게 주로 발병하는 화병은 거의 한국인에게 발병하는 ‘한국인의 질병‘으로 유명하다. 가슴이 곧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속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등 일반적인 우울증 증세와는 다른 증세가 나타난다고 한다. 얼마나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면 화병에 걸릴까.
한국 땅을 밟고 자란 한국인으로 한국인이라면 으레 갖고 있을 만한 애국심을 갖고 살지만 같은 한국인에게 혐오하는 부분이 있다. 허례허식, 자랑하지 않고는 못사는 성미, 비교의식. 그 감정은 가지를 뻗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해를 가한다. 그러나, 극혐 또 극혐하는 나도 내가 싫어하는 의식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은 알고 있더라도 그 현상의 이유나 실체는 알지 못했다. 허례허식, 과시욕, 비교의식은 모멸감의 거울 효과나 방어기제가 아닐까.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는 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다. 큰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내 시큰둥한 눈빛, 미묘한 입꼬리에 읽힌 비웃음, 귀찮은 말투 속에 날카로운 가시는 발가락으로 컴퓨터 전원을 끄는 것처럼 간편해도 누군가에게 자살의 방아쇠가 됐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카뮈는 그렇게 생각했다.(251-252) 나는 그런 적 없다고 감히 단언할 수 없다. 나도 그랬을 거다. 내가 을에게, 갑이 나에게.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속물적이고 악한 나의 모습에 새삼스럽다. 착하기만 하고 불쌍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그렇다고 믿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