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구성상의 특징은 주제와 어떻게 연결될까? 옥희도, 황태수, 옥희도의 아내에 대한 이경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 가지의 선택은 최선/차선/차악/최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태수와의 결혼은 ‘최선’이었다. 12장 이전(*12장은 서사의 분기점이 된다.)까지는 옥희도와 태수의 이야기가 핑퐁으로 진행된다. 옥희도와 태수는 짝패로, 서로가 서로를 비출 때만 의미가 존재하며, 언제나 쌍으로 존재한다. 황태수와 옥희도가 핑퐁으로 진행되면서도, 옥희도가 중심인물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경의 시점이 옥희도에게 중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경은 이러한 지점에서 믿을 수 없는 서술자(1인칭 주인공 시점)에 해당한다.
11장에서는 옥희도가 장난감을 선물하였으며, 12장에서는 조와 호텔을 들어가며, 이경의 트라우마가 유발된다. 조의 경우에는 전쟁기의 미군으로, 이경은 일탈로 일종의 매춘을 하게 된다. 조는 기능적 인물로 인해, ‘조’가 가진 섹슈얼리티는 왕자로 변할 수 없는 야수의 형상만을 가지고 있다. 성장소설은 섹슈얼리티와 죽음이 중심이다. 섹슈얼리티는 본능적인 것 같지만, 충만/금기적인 것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위반을 어떻게 넘기어 충만한 것으로 만드는 지가 섹슈얼리티의 핵심이다. 옥희도와 태수는 섹슈얼리티의 상징이 아니나, 조는 섹슈얼리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전쟁으로 일상이 무너진 이경에게 예술가적인 삶(부유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옥희도는 ‘동경’의 존재이다. 옥희도는 신기와 동경의 존재로, 일상의 존재는 아니다. 이경에게 시민적이며 노동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태수는 ‘생활’의 존재이다. 이경은 부르주아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고가가 무너지게 된다. 오빠들의 죽음, 폭격 등으로 인해 안온하고 부르주아적인 삶이 전부 날아가버린다. 즉, 이경은 전쟁으로 가족이 울타리가 되어주는 제도의 삶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본인이 누려온 일상적인 삶의 믿음이 붕괴되었다. 전쟁으로 “생활”(일상)을 잃은 이경에게 옥희도가 줄 수 없는데 태수가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이다.
왜 이경은 시간이 흐른 뒤 옥희도가 그린 나무를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감각하는 자아와 해석하는 자아로 나뉘어진다. 17장 이전까지 이경은 ‘감각하는 자아’이고, 17장의 이경은 ‘해석하는 자아’로 삶의 경험에 위상을 매긴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히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음을 뿐임을 깨닫는다.
전쟁의 폐허(PX)속에서 옥희도가 그린 나무를 이경은 시간이 지난 뒤, 죽음만을 기다리는 고목이 아니라, 겨울(전쟁 속에서의 삶)을 견디는 나목으로 인식하게 된다. 10년 전의 이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할 녹음이 필요하였기에, 겨울 견디던 옥희도에게 푸른 녹음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이를 깨닫은 이경은 망연함을 느꼈으며, 태수의 말로 인해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일상이 태수와의 결혼으로 인해 회복이 되며,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경은 “살아남았으며”, 살아남은 사람인 이경 눈에 ‘고목’이 ‘나목’으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