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그냥 그런 날은 너무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왜 좋아하냐고 묻는 물음에 이것저것 이유를 갖다 대다 보면
어느새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냥 그 사람이 좋아진 건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아무 이유 없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본 날이나,
버스 창가로 스치는 풍경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을 때,
불 꺼진 집에 들어와 내 온기로 공간을 따뜻하게 덥히기 시작할 때
문득문득 그렇게 감수성에 갇혀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아마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마음속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의 눈물샘을 콕 찔렀겠죠.
그래서 이 책 제목을 봤을 때, 창을 열고 시린 하늘을 봤을 때 눈시울에 무언가
촉촉한 움직임이 생기려고 하는 건 이유가 없이 '그냥' 그런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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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별로 선호하지 않았답니다.
소설은 현실을 담았지만 현실이 아닌 드라마 보는 기분으로 볼 수 있는 '남의 일'인데
에세이는 '내 일'일 수도 있는 것들이라 말이죠. 그런데 이번 에세이, 이 제목의 에세이 읽고 싶어졌어요. 가을이라 그랬던 걸까, 유난히 감수성이 폭발하는 시기였던 것인지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때도 왠지 또 퐁당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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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제목과 표지는 너무나 중요한 거죠.
그런데 내용의 시작부터 밑줄 좍좍 긋고 간직하고 싶은 글귀들로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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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처럼 오늘이 인생의 첫날이라면
내 손엔 그 어떤 짐도 들려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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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나’라는 사람에 대한
다소 과장된 생각과 나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나 스스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좇았던 허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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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다른가 봅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 같아요.
처음을 여는 이 글 외에도 중간 중간 알토란같은 문구들이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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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의 빈 공간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공간에 대한 비유는
엘리베이터를 볼 때마다 떠올려 보게 됩니다.
아무것도 막히지 않은 빈 공간에서의 소리는 일층에서 꼭대기 층까지 그대로 전달되는데
당신과 나 사이의 그 공간에는 무엇이 가로막혀 있어
서로의 감정이, 생각이, 말들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인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선 사람과 나를 돌아보게 만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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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날 따뜻한 감수성으로부터의 공격이 시작된
그냥 눈물이 나 와의 만남.
짧지만 가볍지 않고
크진 않았지만 긴 여운이 남는 이쁜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