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마르셀 프루스트의 신간 『쾌락과 나날』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찾아보니 미행 출판사라는 곳에서 낸 첫 책이라 했다. 프루스트라니. 유명세에 비해 막상 읽은 사람 없기로 1등이 셰익스피어라면, 프루스트는 3등쯤 되지 않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분량은 아무래도 부담이 되니까. 그런데 미행 출판사에서 낸 책에는 단편소설을 포함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법한 글들이 실려 있는 듯하였고, 그러니 언제든 사 읽어야지, 하고 있었다. 이런 책을 내주는 ‘작은’ ‘문학전문의’ 출판사라니, 내심 응원하던 와중에 두 번째 출간 책 정보를 접했다. 조르주 바타유의 ‘시집’이라는 것을 보았고, 서평단 어쩌고 하여서 신청을 해보았다. 가제본 책을 받았다. 바타유라니.
1. 시집 『아르캉젤리크』의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추락하는 밤이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는 생각. 그렇지 않다면 나는 ‘가능’에 종속될 것이다. 그것은 나를 포기하는 대신 (나의 모습 그대로) 내 주권(···)을 보상할 것이다”(148). 다른 시에서 바타유는 이렇게 썼다. “별 하나 없는 밤/무수히 점멸된 공허여/그런 절규가/그토록 오랜 추락으로/그대를 관통한 적이 있는가”(『불가능』, 172).
2. 별: “별 하나 없는 밤” 같은 표현은 블랑쇼의 논지를 참조해도 무방할 것이다(블랑쇼는 바타유와 친연성이 있으니까). 블랑쇼의 『재난의 글쓰기』(『카오스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된)에서 재난(재앙, dés-astre/dis-aster)은 ‘별(astre)이 없는(dés)’을 뜻한다. 여기서 ‘재난’을 기존의 단어적 뉘앙스로서 접근하여 긍/부정의 이분법 중 하나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별이나 별자리는 시각적·인식적으로 익숙한 배치, 일종의 질서이고, 별 없음이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질서 바깥이나, 혹은 ‘나’였던 것의 바깥으로써 공허, 무한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질서이건 익숙한 인식이건) ‘안’에 있던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불가능’의 지대이다. 하지만 블랑쇼는, 혹은 바타유는 그러한 지대로의 이탈이 (어쨌든 ‘나’의 죽음을 담보하니까) 굉장한 고통을 동반할 것임을 알면서도, 바깥을 종용한다.
한병철은 블랑쇼를 참조하여 이렇게 쓴다. “재앙은 비성非星으로서 ‘별들의 공간’에 침입한다. ‘근본적인 이질성’이, 바깥이 정신의 내면성을 열어젖힌다. [...] 재앙은 ‘별들의 보호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한병철, 『아름다움』, 64).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 재앙”은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준다”(한병철, 『에로스』 27). 그러니까 ‘별 하나 없는 밤’은 재앙이고, 카오스, 무한성, 공허 등등의 무엇이다. 별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그러므로 ‘불가능’의 곳이다. 거기 바깥으로, 상처와 균열을 열어서 불가능에 내쳐지는 것,
3. 추락, 죽음 혹은 바깥: 반복하자면, “나를 포기”해야 갈 수 있다. ‘내’가 ‘나’인 상태에서 카오스, 무한성, 불가능에 임할 수 없다. 그곳은 ‘내’가 죽는 곳이다. 내가 나의 바깥에 서는 것은, 엑스터시(ex-stasis)의 뜻이기도 하며, 황홀경, 무아경 등등의 절정의 쾌락을 의미하는 표현과도 동일한 뜻이다. 그러니까 바타유가 ‘에로티즘’에 천착했던 것 중 하나, 오르가즘을 다른 말로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에로티즘의 극단적 양상들이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질서”(바타유, 『에로티즘』 197)이다. “우리는 오직 마구 탕진할 때 마치 상처가 우리 안에서 열리는 것 같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같은 책, 198).
들뢰즈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블랑쇼를 참조하여) “동일한 주체가 나로서 고정되어” 죽는 양상과 대비해서 “죽기를 그치지도 않고 끝내지도 않는다”는 문장을 인용한다(『안티』 485). 즉, 고정된 ‘나’로 사는 것이 죽음과 다를 바 없고, 삶은 끊임없이 동일한 주체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 이전의 ‘나’를 끝없이 죽이는 것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본다. 내가 나의 바깥에 서는 것(엑스터시). 그 바깥이, 유한성, 존재, 유용성, 가능, 의미 등에 종속되지 않는 재난, 무한성, 불가능의 어디.
4. 균열, 상처: 이 바깥은 나의 상처, 균열을 열어젖혀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바타유는 이렇게 쓴다. “내 존재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다. 이것은 내가 갈가리 찢기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결여의 감각 속에서 알아차리게 되는 부재absence다. 그런데 이 부재는 또 다른 사람의 현존을 드러낸다”(바타유, On Nietzsche, 21-22).
5.
나라는 존재는,
그렇지 않다면
있는 그대로를
비겁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증오한다,
이 도구적 삶을
나는 균열을 찾는다,
나의 균열,
부서지기 위해.
나는 비를 사랑한다,
벼락을,
진흙을,
어느 넓은 바다를,
땅속을,
하지만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땅속에서,
오 나의 무덤,
나에게서 나를 해방하라,
나는 더 이상 나이고 싶지 않다.
- 바타유, 「『내적 경험』에서」 부분, 『아르캉젤리크』 중.
6. 바타유에게는 소위 금기와 위반의 철학자, 라는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성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쓰려고 하거나(『에로티즘』에서 사드의 이런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 ······ 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똥’이니 ‘오줌’하는 표현은 바타유 시대(20세기 초중반)에서는 ‘위반’이었을 것이다. 바타유의 표현이나 방식이, 아주 도발적인, 쉽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을 텐데, 일단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지향은 참조할 만하다. 바타유는 자신의 사상을 “분변학糞便學, scatology” 혹은 “이종성異種性, heterology”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컨대, “저급함le bas/lowness을 향한 것”(이브 알랭 브아, 『비정형』, 21).
지향.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우리가, 단단히 믿고 있는, 안정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우리(cage)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적인 금기를 넘거나 ‘저급함’으로 내려가는 것이 이제 더는 ‘위반’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면, ‘위반’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나. 바꿔 말해, 안정적이고 익숙한 것들이 무엇이 있나.
7. 바타유라니. 그것도 시라니. ‘읽는다’기보다는, 단어들을 가지고 (앞서 바타유의) 지향을 조금 참조하여(물론 절대적이지 않고), 그저 별자리를 그리듯 재조합/재구성을 시도할 따름이다. 일단 별이 없는 곳으로 가려면, 일단 별이 먼저 있어야 하니까. 별을 보고, 위치를 확인하고 해야 하니까. 어떤 별(성적인 것이나 저급한 것이나 하는, 바타유의 시대와는 분명히 다를,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있는 듯 없는 듯 금기로 작동하고 있을)인지, 어떤 별이 마치 천장에 붙박힌 듯 있는지, 그리고는 별이 무엇이건, 상처를 열고 바깥으로-‘너’에게 가려면 무얼 파기하고 또 해야 하는지. “나를 무너뜨려라/이 눈물밖에/모르도록”(바타유, 「저 높은 곳에 나의 영광」, 『아르캉젤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