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치즈홀릭님의 서재
  • 삶을 위한 철학수업
  • 이진경
  • 17,100원 (5%540)
  • 2013-11-01
  • : 2,240

지금, 젊음은 자유로운가?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어요?”

 

“응, 독립운동 해서 우리나라의 자유를 찾았단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독재에 맞서 데모하고 자유를 얻었단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음, 토익 공부를 했단다.” 훗날 우리 세대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자유를 위해 싸워본 적이 없다. 기성세대들은 우리더러 “자유에 무임승차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 자유롭게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80년대 대학생보다 자유로운가?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은 이런 자조적 질문을 던지는 젊은 세대를 위한 위로 같았다. 그의 ‘자유론’은 “(자유가) 꼭 피 흘릴 각오를 하지 않고는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처연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유에 배고파보지 않은 우리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자유롭진 않다. 비단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사회 전방위적으로 우린 ‘자발적 구속’ 상태에 있다. 대학 진학에, 취업에, 자식에, 결혼에, 노후 대비에 얽매여 세대 별로 뻔한 삶을 살아간다. 결국 모두가 자유롭다고 하나 누구 하나 ‘제 꼴리는대로’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는)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라는 이진경의 정의(定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이라는 그의 생각이 맘에 들었다.

 

자유의 바다를 헤엄치기

 

문득 스무 살이 넘어서야 수영을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엔 물 속이 감옥 같았다. 코에 물이 들어갈세라 온 몸에 힘을 잔뜩 주니 몸이 제대로 뜰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헤엄쳐야겠다는 의지를 다질수록 몸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수영장에 다닌 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에라, 모르겠다’하고 긴장을 풀고 그냥 물에 몸을 맡기니 신기하게도 몸이 물에 떴다. 그때부터 하나씩 영법(泳法)을 익혀 가며 물 속에서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자유도 수영처럼 어떻게 누려야할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수영을 배우던 때를 기억하니 어렴풋이 어떻게 자유롭게 살아갈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조건들에 나를 맡기고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보자. 작은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게 되며 서서히 감각적 자유를 회복할 것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패배주의도 아니다. 내 삶에서 행복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적극적 자세이다. 

 

훗날 나의 손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나는 행복했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사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느꼈고, 지금은 그것들을 곱씹는 여유가 있으니 한 순간도 내 맘이 자유롭지 않은 때가 없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