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청지기에서 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100년도 더 된 고전작품이지만, 여전히 행동하는 크리스천을 강조하며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더욱이 선한청지기의 버전은 19세기 초판 구성을 충실히 따른 덕분에 저자인 찰스 M. 쉘던이 전하고자 했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등장인물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그가 겪는 고난을 중점으로 챕터가 나뉘는데, 설교를 위해 쓰인 소설답게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일까를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종종 기독교인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여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크리스천의 가장 큰 본질이라면 분명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리라. 그런데 ‘믿는다’는 단어 때문인지, 나를 포함해 신자들의 대부분은 ‘믿고 따른다’를 정신적인 행위로만 국한시킨다. 물론 자신의 마음속에서 신실하게 교리를 따른다는 것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우리 교인들이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바라는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제가 보기엔 만일 이런 찬송을 하는 사람들이 나가서 그 찬송대로 살았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게 많은 문제들이 어떻게든 사라졌겠죠.”- 31쪽
책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실직자의 대사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사회문제들은 원인이 복합적이므로, 이 청년의 말이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잘못된 일반화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최근 한 아파트 경비원은 주민의 갑질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몇몇 사업체들은 코로나19가 터진 이 시기에 생필품이라 할 수 있는 마스크를 이용해 몇 배의 이득을 보려고 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절망 속으로 몰아넣는 사례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발생한다. 이들이 크리스천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인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고난받는 자를 마주했을 때 나는 예수님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하물며 예수님처럼 행동하자는 생각이라도 했을까?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교인이라면, 그 사고의 시작이 있어야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당장에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내 삶의 모든 행동방침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로 정하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 내 머릿속에 새겨진 이 질문 하나만으로,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알아가는 길 위에 올라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