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는 우리가 말다툼을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않고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한마디 하더군.
"에밀, 내버려둬! 저들이 바로…………."
"저들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에밀은 앙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변압기 폭파범 말이야, 바로 저들이 폭파범인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왜 우리를 제비뽑기에서 빼주겠어?"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다만 자네들의 아내를 생각해서 살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네 아버지가 우기자,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지.
"나는 자네들이 진짜 범인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중요한 것은 독일군의 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는 거야.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군- P79
에게 자네들 전부를 죽이라고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아무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거야. 자네들 스스로 희생양을 선택한다면 반인륜적 선택을 하도록 한 그들의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꼴이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도리어 그들의 논리가 정당하고, 그들은 자네들에게 동정을 베푼 셈이 되는 거란 말일세."
다시 구덩이 가에 앉아 베른은 ‘희생양‘, ‘반인륜적선택‘과 같은 단어를 쓰며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어. 그가 충동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숙고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의 말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구나.
"아주 속편하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군. 우리 네 사람 다 죽음의 구덩이로 빠지느니, 한 사람이 희생하여나머지 세 사람을 살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어?"
"죽고 사는 일을 타인의 손에 맡기거나, 다른 사람의목숨을 빼앗는 대가로 자신이 살아난다면 인간으로서존엄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악이 선을 이기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악의 편에 있는 독일 군복- P80
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이야."
이렇게 말한 후 그는 구덩이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버리더구나. 더 이상 그가 보이지 않았어.
네 아버지는 잠자코 있더니 나무 뿌리를 던져버렸지. 우리 모두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술병이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거야. 술병에는독일 곡주가 반쯤 남아 있었어.
우리가 위를 쳐다보니 베른은 벌써 사라져버리고 없었단다. 네 아버지가 "고마워!"라고 소리쳤어. 제일 먼저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신 것은 앙리였단다.
날이 어슴푸레 저물어가기 시작할 때 놈들이 다시 왔어. 그래서 시간이 얼마쯤 흘렀는지 대충 짐작할 수있었지. 날이 저물어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인생도 끝장이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술병에 있던 곡주를 다 마셔버린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어.- P81
아버지! 제가 당신의 여행가방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당신의 여행가방은 릴르를 거쳐 브뤼셀에서 보르도로가는 테제베 기차 선반에 놓여 있습니다. 가방 안에는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정리해놓은 그대로, 크레용이 색깔별로 정돈되어 있고, 레이너 화장품 풀셋트 그리고분이 들어 있어요. 아버지가 무대에서 입던 낡은 광대 의상도 그대로 있구요. 제 직장 동료들인 유럽연합재정부 고위관료들은 제가 들고 가는 여행가방이 무엇이며, 제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제가 여자에게 실연이라도 당해 깊은 상처를 입은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니까요.
아버지! 낡은 광대옷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이나 어릿광대 교사, 아버지의 돌출행동들, 그리고 가스똥 삼촌이해준 이야기, 그 모든 것들은 나의 내면 속 장롱 깊숙이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릴르 역에서 아버지를 끝내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매일밤마다 악몽이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이제 그 모든 것을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려고 합니다. 내일이면 한 사람이 판결받게 됩니다. 전쟁 후에 그는 몇 개의 훈장을 받았고, 국가의 고위관리까지 지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시절에 자칭 "프랑스 정부"라고 일컫는 비시 정부하의 보르도 경찰에서 치안 담당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범죄를저지르고도,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뿐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그는 분명히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비시정부는 실제로 존재했었고, 역사에서 그 부분을 떼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또한 인류에 대한 책임, 인간의 존엄성, 도덕에 따른 행동이 어느 시대의 법률이나 명령보다 우선하기에 그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지금 기차는 그 살인자를 재판하는 도시로 저를 싣고- P98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가스똥 삼촌과 니꼴 숙모, 그밖의 전쟁의 고통을 안고 간 영혼들을 대신하여 제가 그재판에 참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식인귀는 형편없는 어릿광대 짓을 하며 재판을 하나의 가장무도회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옛날의 적들보다도 더 악랄합니다. 옛날의 적들조차도 인간의 존엄성을 배신하는그의 행동을 보며 그를 혐오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살인자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의 삶과 영원한 시간을 대신 누릴 권리라도 있는 양 아직도 자유로운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법정이 살인자에게 어떤형벌을 내리는지 보려고 합니다.
빛나는 권위의 상징인 법정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지 보려고 합니다.
피고의 이름이 뭐냐고요? 마치 갑자기 들려온 메아리처럼, 또는 갑자기 얻어맞은 따귀처럼 그의 이름은 거의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내일이 되면 그 이름을 완전히잊어버리고 싶습니다. 다만 그가 앗아간 생명들의 이름만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습니다.
내일이 되면 저는 눈에 검은 칠을 하고, 양볼에는 빨간 동그라미를 그릴 것입니다. 내일 저는 밤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그 숲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둔 그들을대신하여 존재하려고 합니다. 아버지, 당신이 그렇게도부활시키고 싶어했던 그 사람들 말입니다.
아버지, 내일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최선을다해서 어릿광대 노릇을 하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고 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아버지!- P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