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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님의 서재

앤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읽은 것 중에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2018.10)라는 책이 있어. 표지에쓰인 "화장을 지우고 페미니스트가 되다"라는 문구처럼 그책은 자신이 그렇게 된 과정을 보여주는데, 초등학교 때부터외모 때문에 핍박을 당하다가 6학년 졸업 전에 혼자 떠난 캐나다 유학 생활에서는 그런 핍박을 전혀 느끼지 않아 자존감을 회복했다는 내용이었어. 덕분에 나도 앤의 나라인 캐나다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 캐나다는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외모 평가나 압박은 우리보다 훨씬 덜한 모양이야. 그러나저자는 2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또다시 외모지상주의의 지옥 불에 빠졌나 봐.
넷플릭스 드라마 <빨강머리 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중 하나는 앤과 친구들이 한밤중에 숲에 모여 자신의 성과몸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벨테인 축제를 벌이는 것이었어.
벨테인은 치료와 정결을 상징하는 불을 가운데 두고 동그랗- P230
게 돌며 춤을 추는 의식인데, 길고 하얀 옷을 입은 소녀들이다 함께 손을 모아 불을 붙이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소망을외친 후 반딧불이가 되어 해방의 춤을 추지.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었단다.
벨테인의 여신이자 신성한 어머니, 5월의 여왕님
숲의 야생 사랑과 생명의 수호신 어서 오소서!
강인하고 성스러운 우리 여성들이
이 신성한 밤에 선포하노니
우리 성체는 오로지 우리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할 사람과 신뢰를 나눌 사람을 택하겠습니다.
품위와 경의를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뛰어난 지성을 늘 자랑으로 여기겠습니다.
우리 감정을 존중해 정신을 고양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무시하는 남자는 물리치겠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꺾을 수 없고 상상력은 자유롭습니다.

마침 이 책의 집필을 마치며 밖을 둘러보니 초록이 반짝거리는 5월이 되었더구나. 벨테인 축제를 열기 딱 좋은 시기야. 1나는 너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딸이 벨테인 축제에 참여한 앤처럼 자신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라. 자기 모습이나 성향을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도 기죽지 말고 자신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 되길 바라.- P231
살면서 후회했던 일이 적지 않지만, 내가 그중에서 가장 후회하는 점은 너와 네 동생에게 ‘공부해‘라고 압박하거나 강요한 적이 있다는 거야. 나름으로는 너희들을 자유롭게 키웠다고 자부했던 터이기에 이 책을 쓰면서 매우 괴로웠단다. 늦었지만, 이 아버지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즌3 제9화에는 진보적인 교사 스테이시가 배시에게 ‘교사는 새로운 학생을 만날 수 있지만 부모는학생들처럼 새로운 자식을 만날 수 없고 평생 같이 살아야 하므로 화해하고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 그 장면은 기숙학교에 끌려가는 카켓을 보호하려다가 부상을 당하고 앤을 찾아온 카켓 부모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앤을 말리는 마릴라의 모습과 매우 대조적이야.
마지막에는 배시가 백인에게는 잘하면서 아들인 자신을 포함한 같은 흑인에게는 모질게 대했던 어머니를 책망하자, 그녀는 ‘백인에게 대들다가 맞아 죽은 남편을 보았기에 아들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랬다‘고 울면서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많이 울었지만, 가장 가슴 아- P232
팠던 장면은 바로 그것이었어. 배시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내 부모, 곧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야.
이 책의 머리말에서 썼듯이, 이 세상의 모든 아이와 모든사람이 자신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자각하고당당하게 살기를 바라. 물론 부모나 가족, 친구나 스승, 지역이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사랑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당당한나 자신의 존재감 없이는 무의미한 것 아닐까? 당당한 나없이는 그 무엇과도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으니까.
이 새벽에 문득 앤 그림을 그리다가 네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 한 자 적어본다. 네게 뭘 하지 마라, 고 이야기하지않으려고 평생 노력했지만 오늘만큼은 참고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무엇보다 아이를 앤처럼 자유롭게 자라게 해주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키우지 마라. 부모 찬스니스펙 조작이니 하는 더러운 짓은 제발 상상도 하지 마. 가난한 집 아이라고 함께 놀지 못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부모가 되지 말아라. 마릴라나 매슈처럼 딸도 아닌, 그냥 가족으로 입양한 아이인데도 지극한 사랑으로 키우는 그런 어른이 되어주림. 그들이 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당당하게 자라도록 도와준 것처럼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기억하는 너는 나의 앤이지. 앤과 비교할 것도 없지.- P233
모든 부모에게 그렇듯이 세상에 둘도 없는 딸이고 아들이지.
그 유일성을 지켜주는 게 바로 부모란다. 세상이 요구하는 틀에 집어넣어 인형처럼 만들지 마라. 앤이 인형처럼 변하는 모습은 섬찟하잖아? 그래서 나는 『빨강머리 앤만 좋아하고 그뒷이야기는 싫어했어. 너는 좋은 아내이자 엄마이고 딸이란다.
그러나 앤처럼 언제나 네 유일성을 잊지 말고 살아가길 바라이렇게 긴 편지를 쓴 이유도 바로 그거야. 나도 편지를 쓰는동안 ‘이제 여생을 나의 유일성을 찾는 시간으로 살아볼까‘
생각해보았단다. 그래, 우리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면 세상은좀 더 좋아지겠지? 사랑한다, 딸아, 우리, 앤처럼 살자, 자기만의 삶을 살자, 기성의 속물이 되지 말자, 나를 세우되 남을 돕자, 야만에 맞서 바르게 살자, 그래서 다시 ‘앤‘처럼 살아보자.
앤은 못생기고 충동적이고 때로 거만해. 한마디로 문제아일지도 몰라. 그런데 앤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기에 펄펄 살아있어. 앤이 만약 바른생활 어린이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런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겠지. 앤은 어린 반항아이자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어린 아나키스트야. 그래, 뭔가 새로운 게나오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에이번리도 재미있는 마을이란다. 20세기 초인데도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를 몰아. 농부들은 권력과 무관하게 마을회관- P234
을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살아가. 이장이나 동장도 없어. 다들보수적이지만 결국은 진보가 이겨.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어 있으니까 마을 사람들도 천천히 변화를 겪고. 물론그들은 자연 친화적이야. 앤을 보렴. 말을 비롯해 모든 동식물과 교감하잖아? 앤이 벚꽃과 교감하던 첫 장면을 떠올리면서나도 이 새벽, 자연을 만나러 간다. 이게 바로 하루의 시작이자 인생의 시작이지. 내가 죽는다 해도 그날 새벽은 오늘처럼여전히 새로운 시작일 거야. 안녕.-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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