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두려움을 지워내는 돌봄의 행위돌봄은 가족이 전담해야 한다는 통념을 벗어나, 가족 바깥의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돌봄의 관계망에 주목하기 시작하니 비슷한 사례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루시의 천사들‘과 같은 모임은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죽음』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팀K‘의 경험을 소개했다.
‘팀K‘는 비혼 여성인 친구가 암 투병을 시작하자 그를함께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다. 처음에는 6명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늘어나 30명의 여성이 참여한 네트워크가 되었다.
‘팀K‘ 구성원들은 요일을 정해 항암 치료를 받던 친구를 찾아가 현미채식 중심의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었다. 또한 친구가 전문 의사를 찾아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전 과정을 도왔다. 모- P103
든 노력을 다해도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도움을 받던 친구는 ‘팀K‘ 구성원들을 초대해 작은 파티를 열었다. 충분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마음을 전한 뒤그는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겨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다. 사진가인 혜영은 희소 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여 "아픈 사람을 위한 돌봄, 그리고 돌보는 자를 돌보는
"돌봄 릴레이‘를 시작했던 경험을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썼다. 34 돌봄 릴레이 방식은 실라의 사례나 ‘팀K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돌봄‘을 경험해 본 혜영은서울시 은평구의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만난 페미니스트들과 돌봄 관계망을 만들었다고 한다.
활동가 조한진희도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1인 가구 여성들의 ‘건강 두레‘에 대한 계획을 소개했다. 건강 두레는 돌봄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고, 월차나 주말을 두레 구성원을 돌보는 데 사용하는 일종의상호부조 모임이다. 1인 가구 여성이라는 공통점만으로모인 관계 안에서 돈을 매개로 하지 않고 서로에게 ‘열려 있는 돌봄‘을 시도해 보겠다는 구상이다.
세계 각지에서 가족 바깥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04)13+ all- P104
만들고 계획하는 돌봄 관계망이 마치 매뉴얼이 있기리도 한 듯 서로 닮은꼴인 걸 보면, 여성들은 평등하게 관계 맺으며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생활인의 감각이 발달한게 아닌가 싶다. 돌봄 관계망을 만들어 함께 친구를 돌봤던 이들도 필요할 때는 전문 간병인 등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돌봄의 범위는 무궁무진했다. 돌봄은 신체활동 보조와 위생 관리에 국한된 게 아니니까 말이다. 아픈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밥을 지어 먹고 같이 산책하러 나가는 것, 입원한 친구의남겨진 동식물을 보살피는 것 등이 모두 돌봄의 행위다.
돌봄 관계망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읽다 보니 혼자살면 아플 때 힘들다는 말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두려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지원은 "혼자 살다가 아픈 상황에 대한 공포는드라마처럼 부풀려진 고독, 추상적인 고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포비아phobia를일부러 조성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아플 때친구에게 전화해 본 적이 있으면 그거 별거- P105
아니라고 생각할 텐데, 그런 경험이 없는상태에서 심리적 공포만 부풀어지는 거죠.
저도 혼자 아팠던 때가 있는데 내 집이라는물리적 공간 안에 물 떠다 주는 사람이없다뿐이지 ‘세상천지 나 혼자네‘ 이런 생각은안 들어요. 올케가 음식도 택배로 보내주고,
동생도 오고 친구도 오고 하는 거죠. 혼자 아픈상황을 무서워하고 비혼 여성이 혼자 죽은뒤 반려동물이 사체를 훼손하고 어쩌고 하는상상이 영화에도 나오는데, 커플 중심 사회가비혼을 비난하는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결혼해야 한다는 식의 은근한 협박같은 거요."
박진영은 "혼자 사는 사람은 당연히 아플 때 주로 혼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럴 땐 최선을 다해 아파야죠. 외로울 틈이 어디 있어요?"라고 반문했다. 맞다. 최선을다해 아프고, 혼자 견디기 어려울 때는 도와달라고 말하면 되고, 아픈 사람이 도와달라는 말을 반복할 필요가없는 네트워크를 만들면 된다.
돌봄의 관계망을 나도 만들겠다고 의기충천하다가- P106
도 돌봄으로 허덕이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다시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무리 미화해도 돌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돌보는 사람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인데, 여럿이 부담을 나눈다고 그게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게다가 돌봄의 관계망을 만들려면 ‘사람부자여야 가능할 것 같은데 난 강퍅한 성격 탓에 사람을 거두기는커녕 떨쳐내며 살아와서 같이 하겠다고 나설 친구가 있기나 하려나...
걱정은 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돌봄의 문제는 절대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우에노 지즈코는 ‘팀K‘를 소개하면서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싱글에게는가족을 대신할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없다면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먼저해본 사람들이 "절친한 친구가 많을 필요도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한 말에 은근한 기대를 걸어본다.
그런 돌봄 관계망들은 조한진희의 말마따나 "혈연관계나 친밀한 관계 등으로 배타적 경계를 나누지 않고도 누구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작은 씨앗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 씨앗들이 여기저기에 뿌려지는광경을 보고 싶다.- P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