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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님의 서재
  • 나의 미국 인문 기행
  • 서경식
  • 16,200원 (10%900)
  • 2024-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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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기 위하여인문 기행의 새로운 여정으로 2016년에 방문한 ‘미국‘을 다루기시작한 것은 2019년의 일이다. 그러다 4년 남짓한 세월이 흘러버렸다. 이 시리즈의 앞선 두 책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과 『나의영국 인문 기행』도 결코 빠르게, 부담 없이 써 내려간 작업은 아니었지만 이번 ‘미국‘ 편은 시간이 더 걸렸다. 솔직히 고백하면 예상외로 괴로운 집필이었다.
괴로웠던 까닭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개인적인 이유다. 연재중에 직장을 정년퇴직했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생활에 적잖은 변화가 찾아왔다. 건강에도 이상이 생겼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힘에 부쳤던 이유는, 그간 동아시아를포함해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갖가지 정치적 변동이 정신차리기 힘들 정도로 어지럽고, 하나하나 뒤쫓아가기엔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변동 자체가 예전부터 있었던, 전혀 새롭지 않은되풀이(알렉시예비치의 말 그대로 ‘세컨드핸드‘)이기에 글을 쓰고 묘사하는 입장에서는 어디서 맺고 끊어야할지 곤란했던 것이다.- P250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대상자체가 까다로운 주제였다. 이 책은 내가 처음 찾았던 1980년대의 미국에서 시작하여 트럼프가등장하고 퇴장(재등장?)하는 시기까지 다루지만 그사이 미국사회의 ‘단절‘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아니, 이미 존재했던 ‘단절‘이누가보기에도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말해야할것이다.
단절된 미국은 쇠퇴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며 전락하는 중이다. 다만 이 단말마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면서 수많은 부패와 파괴를 거듭하며 인류 사회에 심대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미국이(그리고 세계가) 변한다는것은 그정도로 멀고 험난한 길이다.
그런 ‘아메리카‘를 단일한 대상으로 파악하며 그 전체상을묘사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아메리카는 진정한 아메리카인 걸까. 명백한 차별주의자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여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지금, ‘정녕 이것이 아메리카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쪽에서는 "이야말로 아메리카다."라고 한껏 고양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아메리카 안팎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메리카‘의 극히 한정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나누어진 단편 속에서 내가 ‘선한 아메- P251
리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는 벤샨이나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볼수있는 부분이기도 하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 했다. 그 이유는나 자신이 간직한 ‘선한 아메리카‘를 향한 애착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국이라는 국가가 ‘선한 아메리카‘의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기대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으로서는 실낱같은 기대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극동‘ 출신의 한 디아스포라의 눈에 비친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을 먼 장래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젊은나날들, 그 암흑시대에 ‘선한 아메리카는 나를 격려하며 힘을 불어넣어주던 존재였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은 현재도 지속중이다. 게다가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서는 미국을 방패 삼은이스라엘이 ‘하마스‘ 섬멸작전을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6장에서 이야기한 가자지구의 인권변호사라지 슬라니 씨도 자택이 폭격당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이집트를 경유해 탈출했다고한다.
우크라이나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방대한 희생자와 난민이 속출하지만 그 종식은 기미조차 보이지- P252
않는다. 피는 끝없이 흐르고 여성과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멈추지않는다. 지역 내전을 훌쩍 뛰어넘어 준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릴 법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질서를 근근이 지탱해주던 국제연합UN은 완전히 기능부전 상태에 빠졌다.
이 전쟁으로 인해 내 마음도 크게, 그리고 끊임없이 흔들리고있다. 일흔 남짓한 인생 동안 보아온 세계가 격동하고 있다. 이지경까지 치닫게 된 데에는 러시아 국내와 벨라루스의 민중운동을겨냥한 과격한 탄압이 있었다. 홍콩과 미얀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내 어두운 예감은 차차 현실화되었다. 급기야 현실이 그 비관적 예측마저 추월해버리고 만 시기가 온것 같다.
나는 195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해서 평화를 누렸어야 할 조국은 그때 이미 내전(한국전쟁)이 시작된상태였다. 막대한 희생을 낳고 1953년에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휴전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얼마나 더 파괴되어야 ‘끝나는‘ 걸까 얼마나 더 죽어야 ‘끝나는‘ 걸까. 내가 살아온 70년 넘는 시간 동안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멈춘 시기는 없었다. 전쟁의 그림자는 언제나음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짙어간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 Prime Levi (1919~- P253
1987)가쓴휴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다.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레비는 함께 라거(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리스계 유대인‘ 모르도나홈과 고향을 향한 방랑길에 동행한다. 현실에 밝고 영리한 장사꾼 출신인이 ‘그리스인‘은 레비에게 현실을 헤치고 나갈가르침을 주는 엄격한스승인 셈이었다. 그 예로 이런 이야기가있다.
입던 죄수복 차림 그대로 아우슈비츠에서 빠져나왔기에 너덜너덜해진 구두를 신은 레비에게 그리스인은 이런 말을 건넨다.
"자넨바보로군. 신발이 없는 사람은 바보야." 신발이 있으면 먹을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닐 수 있지만 없으면 그마저도 할 수 없다는뜻이었다. 레비는 "반박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 논지가 얼마나타당한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명백했다."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를 막 빠져나온 레비는 그리스인의 지략과 대담함 덕분에혼돈에서 조금씩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은 끝났잖아요."라고 말하는 레비에게 그리스인은 "아니, 늘 전쟁이야."라는 ‘기억해야만 할 대답‘을 내뱉었다.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라거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찾아온 경험이었다. 그런데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 속에 자리한 어떤 추악한변형으로, 괴물과도 같은 어떤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에게- P254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일 뿐이었다. ‘늘 전쟁이야‘ ‘인간은 타인에게 늑대야‘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늘 전쟁이야" 이 기나긴 작품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레비의 휴전」은 승리의 기쁨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길한 심연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듯 예언과 함께 끝을 맺는다. 해방되고 8개월 후, 가까스로 고향 밀라노의 집으로 귀환한 레비는 가족과 재회하지만 공포로 가득 찬악몽은 끊임없이 찾아왔다. 밀라노 고향집에서도 수용소에서 매일아침 울려 퍼지던 폴란드어 점호 구령 "브스타바치 Wstawat! (기상!)"
라는 외침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레비는 우리가 누리고있는 것은 아주 잠깐 동안의 ‘휴전‘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알려준다. 이후 40여 년간 평화를 위해 증인으로 활동한 레비는1987년, 자살했다.
2022년 7월 23일,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여당 국민민주연맹NLD의 전 국회의원과 민주화운동 활동가 총 네 명을정치범으로 내몰아 사형을 집행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소식에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다. 사형 자체가 인도주의에 반하는 학살행위라는 이유에서는 물론이고, 무엇보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P255
지켜보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사형이 강행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보도했던 미디어도(적어도 일본에서의 경험에 한정하면) 이 사건에 대해 지극히 미미한 관심을 보였다. 즉 이미 ‘진부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벨라루스의 상황과 홍콩의 민주화운동도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급속히 진부한 옛일이 되어간다.
미얀마 군부가 자행한 정치범 사형 소식은 내 심리를 급속하게 반세기 전으로 되돌려놓았다.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나의 두형이 사상범으로 구속, 투옥되어 한 사람(서승)이 군사재판을 받고한때 ‘사형‘ 선고까지 받은 시기 말이다. 그는 이후 ‘무기징역‘이확정되었고, 다른 형(서준식)은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기를 채우고도 석방되지 못한 채 20년 가까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일본에서 정신을 소모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고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잠을 자야 한다.‘라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귀에선 심장의 고동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스스로에게 되될 뿐이었다. 아무리 끔찍한 일이라도, 아무리 부조리한 일이라도 이렇게 실제로 일어나버린다고.
내 정신을 더 소진시킨 것은 그런 상상 같은 세계와, 내 주위- P256
에서 펼쳐지는 일본 사회의 ‘일상생활‘ 사이의 괴리였다. 지인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할래?", "취직은?", "결혼은?" 하며 아무 일없는 듯 내게 물었다. 나에게는 그런 ‘일상생활‘이 허구였고, 어두운상상 속의 감옥이나 형장이야말로 진실이었다. 이 책에서 쓴첫 ‘미국 여행‘을 떠난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미얀마에서 벌어진처형 소식을 접하고, 그때의 애통한 마음이 반세기 넘게 지난지금 또렷이 되살아났다. 그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반세기 전의내가 다름 아닌 ‘진실‘이며, 그 후로 어떻게든 평화롭게 살아온나는 ‘허구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병들고 괴로워하는 상황. 진실은 거기에 있다. 지금 내가 있는곳이 ‘허구 쪽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SvetlanaAlexievich (1948~)의 『세컨드핸드 타임이라는 저서가 있다.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제목이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지옥‘이라 불리던 독소전쟁의 전장이었다. 이 전쟁의 희생자(전사, 전병사)는 소련군이 1470만 명,
독일군이 390만 명이었다. 민간인 사망자까지 포함하면 소련은2000~3000만명, 독일은 약 600~1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련의 군인, 민간인 사상자의 총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체 교전- P257
국가운데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인류사상 벌어진 모든 전쟁과 분쟁 중에서 최대 사망자수를 기록했다.
그런 과거를 겪었지만, 똑같은 장소에서 전쟁과 잔학 행위가반복되고 있다. 그곳에서 외치는 슬로건은 알렉시예비치의 저서제목 그대로 모두 ‘세컨드핸드‘이다. 여기서 ‘세컨드핸드‘란 ‘이념‘
의 중고품이라는 의미다. 소련이라는 실험이 좌절하고, 사회주의의 이상도 붕괴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도 신자유주의의 발호와만연을 불러와 빈부 격차는 극대화되고 민족분쟁도 다시 불붙었다. 구소련을 구성했던 많은 국가에서 권위주의 체제가 구축됐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결국 소련 붕괴가 초래한사태다. ‘유토피아의폐허‘다. 이 폐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까. 어떻게든파괴된 이상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나는 현재의 세계는 ‘민주주의‘, ‘인권‘, ‘피억압 민족해방‘ 등보편적 이상의 깃발 아래 ‘파시즘‘, ‘나치즘‘, ‘천황제 군국주의‘ 같은 눈에 잘 드러나던 ‘악‘과 싸운 결과의 도달점이라고 이해해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난도 고통도 가득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이상‘을 공유하는 일이 가능한 시대였다.
결국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이상‘을 잃어버리고 무력만이 살아남았다. 지금은 냉소주의가 승전가를 부르며 ‘죽음의 무도‘를- P258
추고 있다. ‘이상이 사라진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훨씬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세력이패배하고 냉전이 일단 종결되며, 세계는 가까스로 평화를 향유할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트럼프 지지자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이민자 배척을부르짖는 우익 세력이 약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미얀마도 모두 급속하게 진부한 일‘이 되고 있다.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마저 이렇게 진부해져버릴 것이다. 가자지구에서는 최근 2개월에 불과한 짧은 기간에 약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제연합이 내놓은 ‘인도적 정전‘ 결의안은 미국의 거부로 백지화되었다.(영국은 표결에서 기권했다.) 가자라는 좁은 지역에 갇힌 사람들을 향한 일방적인 무력 사용. 다름 아닌 제노사이드(대량학살)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나쁜 아메리카‘의 추한 민낯이 남김없이 드러난다. 물론 자국의그런 행태에 적지 않은 희생을 감수하며 항의하는 ‘선한 아메리카‘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그 힘은 열세에 몰리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총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하버드 대학의 총장도 사임압박을 받고 있다. 집단 히스테리라고도, 현대판 매카시즘이라고- P259
도부를 법한 현상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반이스라엘‘과 ‘반유대주의‘는 차원도 범주도 다른 개념이다. 이러한 (종종 의도적인)혼동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반유대주의‘ 언설의 폭풍이 사납게 불어댄다. 반지성의 극치라고도 할수있다. 이런 상황속에서 ‘인문 기행‘ 따위를 쓰는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 ‘선한 이들을 응원하고 인문주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이야기해야만 하는걸까.
이쯤에서 ‘미국인문 기행‘의 펜을 내려놓으려 한다.
책에서 언급한사람들 외에도 수없이 많은 선한사람들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메리카‘란 무엇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아메리카‘는 단일한 어떤 곳이 아니라, 여럿이 서로 갈등하고 항쟁하는복수의 문화가 부딪히는 ‘장‘‘‘‘일 것이다. 나는 ‘아메리카‘를 좋아하며, 동시에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 모순과 항쟁이야말로 ‘아메리카‘이리라.
이 책 전반부에서 이야기한 미국 여행의 직접적인 목적은 미국의 여론에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국무부 인권국에 호소하여 형들을 포함한 한국의 정치범을 향한 학대 행위를 조금이라- P260
도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 나의 여행이 그다지효과가 있었다고는 생각진 않지만, 당시는 그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순으로 가득찬 행위였다.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뒷배, 바꿔 말하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인권 탄압의 당사자이기도 한 미국에게 호소하러 간것이었으니.
당시 체재 중에 내가 배운 것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미국정부에게는 보편적 이념이라기보다 국익을 위한 ‘자원‘이라는점이었다. 그런 당연한 사정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나는 그런 전제를세워놓고 미국이라는 ‘장‘을 활용하려고 했다. 물론 나 같은 무력한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대도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쓰면서 당시의 나, 극동에서 온 정치범 가족인젊은이에게 소박한 선의를 갖고 다가와준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작은 힘이 세계를 바꾼다." 따위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암흑만을 보고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직도 더 크고 깊은 암흑을 볼 일이남아있는지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페이지다.-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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