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 실연이라는 깊은 심연에도 끝은 있다
‘사랑 안 해’ 혹은 ‘밥만 잘 먹더라’
p.38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함께하실래요?
실연 앞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별 이후를 노래한 음악들을 살펴보면, 백지영의 ‘사랑 안 해’처럼 앞으로 모든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곤 한다. 반면에 옴므의 ‘밥만 잘 먹더라’에선 생각보다 견딜 만 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하림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같이 새로운 사랑을 통해 옛 인연을 극복하기도 한다. 백영옥 작가의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의 주인공인 윤사강, 이지훈, 정미도는 아직 싸이월드를 한다면 배경음악으로 ‘사랑 안 해’를 설정해 놓고 삼시세끼를 굶어가며 청승을 부릴 이들이다.
실연이란 편지에 동봉된 죄책감과 그리움
p.26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였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들은 야생동물이 큰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들어가 자신을 핥듯, 자신을 고립시켜 스스로를 회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흘러흘러 어느 수상한 이가 주최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 참석한 후 여러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 소설의 큰 줄기다.
p.44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
p.55 실연의 흔적이 남긴 것들이 어째서 이토록 반짝이는 걸까.
이미 죽어버린 후에도 이 빛들은 왜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실연’은 두 연인 간의 열정적 관계의 소멸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별을 선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던 비극적 죄책감이든, 말라가는 관계와 더불어 빛이 바래가는 옛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실연’이란 편지의 뒷면에 동봉되어 있다. 그것들은 이별 자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잔재들이기에 그들은 결코 자력으론 극복할 수 없다. 그것이 정신과 의사든, 친한 친구든 혹은 비슷한 이별의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이든 ‘털어놓아야’한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객관화시키고 그것에 직면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p.280 스스로의 삶을 관통하는 말은 하기 힘들다. 죄책감은 말의 껍질을 깨뜨리고, 분노와 슬픔은 껍질 안의 말을 짓눌러 부숴버리기 때문이다.
과거 정신과의사 프로이트를 찾아 억압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회복되었던 수많은 환자들처럼, ‘조찬 모임’이라는 틀 안에서 참여자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자신만의 이별 기념품을 청산하며 비로소 그동안 외면해왔던 이별을 직면할 용기를 얻는다.
p.317 모든 연애에는 마지막이 필요하고, 끝내 찍어야 할 마침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사람은 도리 없이 어른이 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실연을 겪는 이들을 위한 깔끔한 처방전
p.288-289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에요. 전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아요. …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철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사랑에 관한 이야기고, 여행을 주된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가 떠올랐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가능한 한 ‘사랑’이라는 현상을 포착하기 위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문장의 나열을 사용했다면, 백영옥 작가는 카피라이터 출신답게 깔끔한 한 문장으로 핵심을 짚어내려고 한다. 알랭 드 보통이 소설의 외피를 쓴 사랑에 대한 보고서라면, 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소설 그 자체의 재미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영화 중에서 하정우와 전도연이 주연을 맡았던 〈멋진 하루〉도 실연 후의 연인들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영화 쪽이 책보다 좀 더 질척거리고 현실적이다. 이별의 아픔을 겪는 이들을 위한 조찬 모임이라는 특이한 아이디어를 통해 일탈적 맥락 속에서 치유의 경험을 하는 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채무 상환의 목적으로 전 남자친구를 찾아온 여자가 그와 함께 하며 겪는 고된 하루가 묵묵히 진행되며 일상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익숙한 편함 속에 주인공들은 위안을 얻는데, 이별 뒤에 숟가락을 놓지 않고, 몇 숟갈이라도 떠먹는 현실주의자들은 이쪽이 어울릴 것 같다.
당신을 위해 준비된 따뜻한 유기농 문장
소설과 에세이 등 다방면을 종횡무진하는 백영옥 작가의 책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다면 그것은 ‘위로’다. 나도 다 해봤다면서 배려없는 조언을 내뱉곤 하는 꼰대의 방식이 아닌, 자신의 아픔을 보여주며 너도 극복할 수 있다며 은근히 전하는 따뜻함이 그녀의 글에선 느껴진다. 직장이나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이 책은 상처 입은 내면을 토닥여주는 잘 차려진 따뜻한 밥상이라고 되어줄 수 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그녀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조찬 모임’에 참여한다면 그녀가 준비한 유기농 문장들을 곱씹으며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p.321 '고마워'로 시작하는 사랑보단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힘들다. 상대보다 힘들어지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이별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알 수 없다. …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진짜 이별을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