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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레님의 서재
  • 소용돌이
  • 전건우
  • 13,320원 (10%740)
  • 2017-08-16
  • : 349

전건우 작가의 <소용돌이>를 읽으면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물음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인생을 살며 내가 가장 외로움을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책을 덮고 난 후 어렴풋이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내 인생이지만, 내 인생을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모든 걸 간단없이 떨쳐버리고 훌쩍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여행이든, 죽음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해, 죽지 못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 이 명징한 현실이 이 생의 수레바퀴 안에 갇힌 나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


민호(주인공), 창현, 명자, 길태,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비로서 고향, 안주시 광선읍 광선리로 친구들을 불러들인 유민의 존재까지. 이들은 광선리의 아름다운 하늘과 축축한 저수지의 정서까지 공유한 국민학교 동창이자, 절대 떨어져서 서로를 생각할 수 없는 독수리 오형제이며, 각자가 가진 저마다의 결핍의 색과 향기마저 닮은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어주면서 친구를 너머 형제가 되고, 오빠가 되고, 결국 광선리(고향)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그들은 유년 시절을 거치면서, 가장 빛나는 우정을 얻음과 동시에 가장 어두운 비극을 공유한 채, 떠밀리듯 이별(상실)하게 된다.


그 누구보다 더 겨드랑이 털(성장)에 집착했던 주인공 민호는 아버지가 선물해주신 카메라를 통해 삶이 아닌 죽음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사가 되었고, 먹는 것에 유달리 집착했던 길태는 주먹 쓰는 실천파의 2인자가, 부잣집 아들에 이성적인 판단을 도맡아 했던 동네의 자랑 창현은 이혼을 앞둔 시간강사가,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밝았던 명자는 술 파는 아가씨가, 변해가는 동네를 지키며 언젠가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일 날을 꿈꾸었을 유민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친구들과 대면하게 된다.


소용돌이에 등장하는 저수지와 물귀신의 존재는 우리가 익히 추측 가능한 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의 대체물일 가능성이 크다. 생의 온갖 부유물로 가득 차 그곳의 깊이도, 속사정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 안에서 어떤 것이 길어올려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것의 존재만으로도 각자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공포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큰 공포는 그것이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자, 정말 사랑했지만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이 전 생애를 걸쳐 시시각각 마음속 두려움을 부추겨왔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두려움'은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이기에, 극복할 수 없는 대상처럼 여겨지지만,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극복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들이 고향으로 다시금 돌아가, 처절하게 저수지의 물귀신에 맞서 싸우는 장면은, 때문에 무시무시함보다는 비릿하고 축축한 슬픔의 정서와, 가장 완벽한 시간 속 우정을 나눈 이들만이 느낄 수 있는 합일의 감동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귀신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 속에서, 주인공 민호는 죽음의 장면을 포착하는 사진가 답게 죽음에 지속적으로 탐닉하지만, 삶의 소중함을 환기하고 동시에 갈구하기도 한다. 이는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인공 민호가 느끼는 안도감에서 비롯된다.


*


누구나 두려움으로 질척거리는 저수지의 맨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저수지 위로 비쳐드는 따스한 햇빛 한줌을 쐴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가장 큰 장기인 공포로, 무려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야기로 무리없이 펼쳐낸 전건우 작가의 저력에 내내 감탄한 시간이었다.


*


작가의 말에서 전건우 작가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글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둠 속에서 한줌의 빛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겠다". 작가의 공식적 표명에 가까운 이 한 마디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감히 단언하는 것은 그렇지만, 전작 <밤의 이야기꾼들>을 뛰어넘는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쁜 처자 잠깐만"
할머니가 식당 앞까지 따라 나와 명자를 불렀다. 그러고는 명자의 귀이다가 몇 마디를 속삭였다. 내 옆으로 다가온 명자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왜?"
"비결."
"응?"
"청국장 말이야. 미원을 많이 넣으면 된대."
명자는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우리 둘을 멀뚱히 바라봤다.
역시, 비결은 미원이구나.
역시, 웃는 건 좋은 거구나.
역시, 옛친구는 좋구나.

-216p
내 마음속에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유물이 떠다니는 어둡고 차가운 저수지가 출렁이고 있었다. 언제든 범람의 때를 기다리며.

-4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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