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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gjun 2018/09/1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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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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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2018-06-15
: 13,101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명」
예기치 않게 깊숙하게 찔러오는 저자의 질문을 읽는 내내 피할 수 없었다. 권리를 쉼없이 고민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전혀 다른 눈높이에서 낱낱이 드러내며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건 대체 뭔가.
나는 '보여지는 나'와 '지켜보는 나'로 분리해 품격있게 행동하는 퍼포먼스적 인간일까, 진실을 공유하며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는 인간일까.(존엄에는 최고와 최저가 없건만 '최고 존엄'이라는 말은 얼마나 기괴한가)
장애인을 결핍, 비정상,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고유성을 가지고 저마다 이야기를 써가는 저자로 존중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노동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노동자를 결핍으로 바라보는 가장 뿌리깊은 문제를 통렬하게 반성하게 만드는 지적이기도 하다.
매드 프라이드(Mad Pride)운동처럼 그저 비정상으로 취급해버리는 시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미친 자가 아닌 또 다른 인간적 특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삶은 풍요하다. 지질한 노동자가 아니라 또 다른 고유성과 자부심을 가진 이야기 주체로 노동자를 받아들일 때 비로서 쉼 없는 역동성을 가진 혁명과 운동이 가능하다. (아, 여기에 미달하는 노동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동권'을 창조해온 장애인들의 투쟁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제야 알았다. 결핍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해 달라"는 운동을 넘어서 이동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는 운동은 엄청나게 다르다. 장애인 운동에서 이동권의 발명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깊이 공감한다. 사회운동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전환이다.
이동권을 발명하기 위해 갇혀있던 장애인이 거리로 나오고, 싸우고, 법제도에 진입시키는 과정이야 말로 '수행적 가치'가 충만한 실천이다. 고호의 그림과 그림을 찍어 놓은 복사본의 차이는 바로 수행적 가치가 있는가의 차이다. 이당저당잡당들이 대리정치를 위한 쇼를 해댈 때 노동시민이 권리주체로 자력화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나는 장애인 저자와 장애인들의 생생한 고뇌와 실천에서 어느 때 보다 찐하게 배웠다.
풍만하고도 농익은 사랑을 물씬 느끼게 했던 신체를 떠올리고자 했을 때 왜 그토록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을까를 생각하곤 했다. 다시 그 신체를 예의 주시한 다음에도 사진처럼 기억할 순 없었다. 비로소 왜 그런지 이해 할 수 있다. 우린 그 사람 서사를 존중함으로서 사랑하고 농축된 맥락속에서 그 몸을 욕망한다. 사진이 아닌 회화처럼 기억한다는 걸 김원영의 책을 통해 비로서 깨달았다.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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