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 보다』와 『시 보다』 시리즈에 이어 론칭한 『SF 보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얼음'을 소재로 한 여섯 편의 단편을 모았다. 작가들 라인업이 좋아서 궁금한 마음에 가제본 서평단을 신청했는데, 당첨되어 가제본을 제공받았다. 가제본에는 단편 여섯 편만 수록되어 있다. 정식 출간본에는 책의 시작과 끝에 문지혁 작가의 '하이퍼 링크'와 심완선 평론가의 '크리틱'이 수록되어 있다는데, 개인적으로 이 글도 궁금해서 정식 출간본으로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심완선 평론가의 글이 너무 궁금하다. 기획 위원이니 시리즈에 글을 쭉 실리겠지? 앞으로 나올 시리즈도 기대된다!
작가들이 워낙 자신의 개성이 강한 작가라, '얼음'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쓴 이야기지만 여섯 편 모두 각자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짧은 이야기지만 그 여운은 엄청나다. 경쾌하게 얼음을 씹는 느낌이 나기도 하고, 얼음을 씹었을 때의 시린 느낌이 부각되기도 하고, 차가움과 상반되는 따스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앤솔러지다.
🧊「얼어붙은 이야기」 곽재식
자신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발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첫 시작이 이렇기 때문에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한 궁금증이 아주 커진 상태로 읽게 된다. 주인공이 트럭에 치이기 직전 시공간이 멈추고 생사귀가 등장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개되는데, 그 이야기의 끝이 다시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간다. 궁금증과 속도감 있는 대화로 순식간에 읽은 단편이다. 역시 곽재식 작가답게 현실인 듯 현실 아닌 이야기를 유쾌하게 전달한다. '이렇게 전개된다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읽다 보면 그 이야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
🔖 "인생이 길지 않잖아요. 수십억 년 된 행성과 별들이 지내오는 시간에 비하면 백 년쯤은 잠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나마 넓디넓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보내는 삶이거든요. 그런데도 그게 굉장히 귀중하다는 생각은 또 있어요. 아까 우리가 이야기했던 대로, 이런 삶 하나를 위해서 은하계 몇 개를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p.34)
🧊「채빙」 구병모
세상의 거의 모든 얼음이 녹으며 인류가 거의 절멸 직전까지 몰린 뒤, 현대 문명은 물속에 잠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시대. 사람들이 채빙을 하러 오는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존재가 주인공이다. 연유를 모르지만 배경지식을 지니고 있는데, 자신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사한 혹은 현명이라 부르며 추앙한다. 두 무리의 갈등을 모두 지켜보지만 개입할 수 없어 그저 바라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한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얼음새꽃을 마주한다. 관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생각을 엿듣는 느낌인데, 너무 슬펐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모든 사람을 애처롭게 생각한 그. 자신은 사한도 현명도 아니라 했지만 이런 마음을 가졌는데 사한이나 현명이 아닐 리가.
🔖 그 안에서 너무 춥지 않기를…… (p.54)
🧊「얼음을 씹다」 남유하
혹한으로 생존이 어려운 시대. 먹을 것 역시 부족하므로 사람들은 죽은 이를 먹는 풍습을 갖게 되었다. 시체를 먹지 않고 유기하는 자는 위법자다. 유리아는 죽은 딸을 차마 먹을 수 없어 딸의 시체를 보호하려고 한다. 자신의 시체가 먹히지 않기를 바라는 자들이 몸을 던지는 배반의 호수에 가지만, 그곳에는 시체를 노리는 시체 사냥꾼들이 있다. 결국 전 연인인 알렉의 집에 아이를 보관하게 되었지만, 그것 역시 안전하지 않다. 인육을 먹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들 속에서 그 모습을 끔찍하게 여기는 유리아.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유리아의 모습은 처참하다. 유리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로테스크한 묘사로 눈살을 찌푸리게 되지만 이상하게 계속 읽게 된다. 시린 매력이 있는 작품.
🔖 먹지 않아. 먹지 않아. 난 널 먹지 않아. (p.96)
🧊「귓속의 세입자」 박문영
회사 워크숍이라는 명목으로 이탈리아에 끌려온 해빈. 2034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강제로 관전하게 된다. 수많은 인파의 열광을 견디지 못하는 해빈은 힘겨워 한다. 해빈과 함께 온 세입자도 있다. 해빈의 왼쪽 귀에 사는 세입자다. '온기 때문에 행성 문명의 일부가 파괴'된 곳에서 온 세입자는 어찌 보면 해빈의 처지와 비슷해 보인다. '열기는 주변으로 퍼지면서 많은 걸 오염'시킨다고 하지만,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물론 어떤 때에는 과도한 열광이 거슬릴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외따로 산다면, 살 수 있을까? 나만 해도 혼자 다니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렇다고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는 것은 아닌걸. 하지만 세입자의 모이면 더 큰 구획이 만들어지며, 서로의 경계가 선명해진다는 말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인간은 지성체가 아니에요. 사람은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고 만져야 살아갈 수 있어요.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요." (p.119)
🧊「차가운 파수꾼」 연여름 (BEST!)
온도 상승으로 영구동토층이 녹으며 건물이 붕괴하는 지역. 노이가 사는 아파트는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그 아래에서 온도를 유지시키고 있는 선샤인 덕분이다. 피부가 햇빛에 노출되면 상처를 입는 노이는 이모를 이어 선샤인을 돕고 있다. 하지만 선샤인의 힘은 계속 약해지고 있고, 끝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노이도, 선샤인도 알고 있다. 그러던 중 외부인 이제트가 아파트에 등장한다. 이제트는 몸이 회복되면 멀리 떠날 거라고 하지만, 노이와 가까워진다. 노이는 끝이 다가옴을 알기에 이제트에게 얼른 떠나라고 하고, 이제트는 함께 떠나자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선샤인이 있는 지하 2층의 온도가 다시 내려간다. 한없이 차가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 여섯 편 중 가장 여운이 긴 단편이었는데 구구절절 설명하면 스포일러가 될까 자제했더니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지만 좋은 이야기다.
🔖 무모하긴. 방법 같은 게 어디 있다고. (p.160)
🧊「운조를 위한」 천선란
운조는 수의사다. 동물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얼리기도 한다. 폭설을 헤치고 이동하느라 얼었던 무릎 아래의 다리의 감각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운조였지만 병원에 가지 못하고 마거릿의 연구소로 향한다. 마거릿은 '냉동 보존' 기술을 상용화시킨 연구소의 책임자다. 그러나 운조가 도착했을 때, 마거릿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불길함을 느낀 운조는 마거릿을 찾아나서다 액체 속에 빠진다. 눈을 떴을 때엔, 뿌연 피부를 가진 생명체를 마주한다. 그들과 지내며 운조는 자신의 첫 반려동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는다. 깨어난 곳은 처음 사고를 당한 시점으로부터 1,690년이 지난 미래다. 붉은 눈에 뒤덮인 세계의 작은 큐브 안에 모여 있는 모든 것을 잃은 이들. 붉은 눈(snow)에 파묻혀, 붉은 눈(eye)에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묘사가 인상 깊었다.
🔖 그 땅에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는 무정한 한줄기의 비로 내리더라도. (p.198)
*서평단에 당첨되어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