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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상자님의 서재
  •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 8,100원 (10%450)
  • 2004-05-15
  • : 81,978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힌 요조에게
『인간실격』,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
 

1. 타인과 세계, 그 속에 비친 나
  인간실격은 총 세 개의 수기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수기는 ‘요조’라는 하나의 인간이 무(無)에서 유(有)로 나아가는 과정을 단계 별로 담고 있다. 처음에는 자기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 자아를 발견·실현하는 과정을 거쳐 끝내 자기부정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요조는 자신의 삶에 불쑥 끼어 든 타인들과 관계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세상 속으로 조금씩 뛰어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이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변화해간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요조에게 점점 더 죄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과정이자 자기혐오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이 되었다.
  첫 번째 수기(유아기~초등학생)에서 요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진공 상태로 규정한다.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선천적으로 섬세한 기질을 타고 난 요조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공복감을 느껴 밥을 먹거나 마음에도 없는 말들로 인사치레를 하는 인간사회의 행위들에 반기를 들며 세상과 거리감을 두며 살아간다. 요조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조가 고안한 것이 ‘익살’이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조는 집과 학교에서 익살꾼 역할을 자처하며 자신의 부적응적인 면모가 들키지 않도록 늘 조심하며 살아간다.
  두 번째 수기(중학교~고등학교)에서는 자아실현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과 희망이 돋보인다. 비록 인간에 대한 공포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지만 요조는 다케이치가 ‘도깨비 그림’이라고 말하는 자화상들을 그리고, 그 그림들을 다케이치에게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의 우울하고 음산한 내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증폭되는 계기는 카페의 여급 쓰네코와의 만남이었다. 요조는 긴자 카페에 있는 여급 쓰네코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녀와의 하룻밤에서 “행복”과 “해방”감을 느낀다. 이 동질감은 쓰네코가 호리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며 연민의 감정이 되고, 요조는 이를 사랑의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요조는 쓰네코에게 우유 한 잔 사줄 돈조차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선택지에 없다. 결국 이들은 가마쿠라의 바다로 뛰어들며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세 번째 수기(고등학교~현재)에서 요조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며 마침내 “진정한 폐인”, “인간실격”이 된다. 쓰네코와의 동반 자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쓰네코는 죽고, 요조는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사건 이후 살아 있는 시체와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요조에게 쓰네코는 자신의 내면을 이해받을 수 있는, 내가 나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단 하나의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것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따라서 요조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막 살기 시작한다. 경제적 자립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조차 유지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 요조는 술에 기대어 살거나, 정부(情夫) 생활을 하거나, 약물 중독에 걸리며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이 와중에 요조는 요시코와 동거 생활을 하며 평범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누리고자 하지만 그녀가 강간당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이러한 기대 역시 무참히 좌절돼버리고 만다.
 
2. 죄가 아닌 것이 없는 세상
  무엇이 그렇게 죄스러웠을까. 책을 읽는 내내 요조는 모멸감에 시달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을 ‘죄’라고 규정하며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이는 책의 말미에 등장하는 ‘반의어 맞히기 게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검정의 반의어는 하양. 그러나 하양의 반의어는 빨강. 빨강의 반의어는 검정.”이라는 난해한 공식을 가지고 있는 이 게임은 요조에게 의문을 남긴다. “죄의 반의어는 뭘까”라는 물음에 호리키는 ‘법, 선, 선량한 시민’ 같은 것들을 대답으로 내놓지만 요조가 생각하기에 죄라는 것은 단순히 ‘악(惡)’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신, ……구원, ……사랑, ……빛, ……그러나 하나님한테는 사탄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구원의 반의어는 고뇌일 테고, 사랑에는 증오, 빛에는 어둠이라는 반의어가 있고, 선에는 악,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뭘까?”
  반의어 맞히기 게임이 끝난 후에도 요조는 ‘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죄의 반의어, 즉 ‘죄가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이 그것인 채로 세상에 떳떳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어떠한 상처도 만들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으며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요조에게 ‘죄가 아닌 것’을 찾는 일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나락 같은 인생 속에서 그동안 요조가 희망하고 추구했던 가치들은 모두 다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죄는 호리키가 지적했듯이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는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는 죄는 살면서 저지르게 되는 모든 종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를 의미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되는 모든 행동 말이다.
  요조가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망가져가는 인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기대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들은 예외 없이 ‘죄’가 되었다. 쓰네코와의 관계 속에서 요조는 ‘사랑’을 느꼈으나 그 사랑은 쓰네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즉 사랑은 죄가 되었다. 정부 생활을 하던 요조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던 시게코에게서 ‘순수’를 발견하며 거기에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진짜 아빠가 갖고 싶어”라는 시게코의 한 마디 말에 요조는 상처를 받는다. 즉 순수도 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동거 생활을 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현장을 목격하며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무구한 신뢰심도 죄인가?” 즉 요시코가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무구한 신뢰심 역시 죄가 된 것이다.
  사랑도 순수도 무구한 신뢰심도 죄가 되는 세상에서 요조는 자신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요조는 생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놓아버리기 시작한다. 약물 중독에 자살 기도까지 하며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살기도가 실패한 후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신세가 되자 요조는 말한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요조가 내린 결론은 ‘무저항’이었다. 세상의 모든 희망과 기대와 욕구들이 ‘죄’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단념해버리는 것이 죄인이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3. 완전한 단념은 가능한가
  그러나 완전한 단념이 가능한 걸까. 죄를 피하기 위해,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의미도 두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책의 맨 마지막 구절을 읽어 보면 일견 가능한 일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의외로 건조하고 담담했다. 행복도 불행도 없는 삶, 모든 순간이 의미 없이 휘발되어버리는 삶, 내일 곧 죽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을 삶. 요조는 그런 삶 속에 놓인 상태로 마지막 독백을 마무리한다.
  책은 끝났으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책을 읽은 독자라면 스물일곱이 된 요조는 요양지에서 자살로든 폐결핵으로든 가까운 미래에 생을 마감할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버리기엔 무언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요조는 지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삶에 대해 지나치게 비일관적이고 균열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삶을 완전히 체념해버린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희망을 가지는가 하면, 그 희망이 무참히 꺾여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 또 어느 순간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기도 하는. 그가 그려온 삶의 궤적은 ‘무저항’으로 향하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기 보다는 차라리 ‘희망’과 ‘단념’의 끝없는 파노라마처럼 보였다.
  희망은 모호한 방식으로 요조에게 손 내밀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런 수단에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다고 말하던 어린 요조는 어느 날 문득 다케이치에게 엉덩방아 찧는 연기가 들통나버렸고, 다케이치와의 교제는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라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다져주었다. 술과 여자에 기대어 방탕한 삶을 살던 요조는 쓰네코의 “걱정 마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의 빗장을 풀기도 했다. 심지어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스탠드바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후에도 “술을 끊으라고 권하는 처녀” 때문에 “차차 인간다운 것이 되”기를 꿈꾼 적도 있다. 즉 요조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한 단념과 말도 안 되는 희망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일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조의 생은 파멸로 치닫는 인간실격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기다리는 끈질긴 생존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쩌면, 따뜻한 바닷가 온천지의 요양원에서 탈출한 요조가, 사소하고 우연한 계기를 통해, 다시 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미래를 상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4.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면
  완전한 단념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요조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무언가를 ‘기대’하고 ‘욕구’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일이니까. 우리는 요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랑을 희망하고 순수를 꿈꾸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죄를 저지르게 된다. 삶과 세계로부터 배신당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반대로 타인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주며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될 수 있다. 이때 요조는 더 이상 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말을 택했다. 죄가 아닌 것은 ‘무저항’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무저항’, 즉 삶에 대해 어떠한 미련도 갖지 않고 완전히 체념해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요조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죄의 반의어는 ‘용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죄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면 있는 죄를 덮어버리는 것만이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것만이 ‘죄가 아닌 것’, 즉 죄의 반의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꿈꾸고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죄가 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죄들을 하나하나씩 배척하며 행동반경을 좁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타인의 죄를 용서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살아가는 내내 죄의식에 시달리는 요조에게 필요했던 것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선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지침이 아니라 ‘너는 죄를 졌지만 그래도 괜찮아’라는 한 마디의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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