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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1 - 10
  • 황석영 엮음
  • 13,050원 (10%720)
  • 2015-01-30
  • : 543

여러 작가의 작품을 한 데 모은 단편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 명단편선’ 따위의 이름이 붙은 책들을 강제로 읽고 독후감을 써내야 했던 불쾌한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때문이다. 또 나이가 들고 이상한 편집증 같은 게 생기면서 다른 색깔의 것들이 섞여 있는 느낌이 불편할 때가 있어 요새는 읽더라도 한 작가의 단편집을 읽는 때가 많다. 하지만 <한국명단편 101> 10권에 실린 열한 개의 작품은 모난 데 없이 술술 읽혀 마치 하나의 노래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과장이 보태졌지만 작품을 잘 선정한 것 같다는 얘기다.)

선정된 소설들은 현대의 소설이니만큼 주변의 사연들을 원고지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강했다. 물론 그 속엔 나의 모습도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 사는 모습은 내가 가장 모르는 법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보면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 나는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라고 말이다.

편혜영 작가의 <저녁의 구애>를 읽으면서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의 한 시절과 겹쳐졌다. 소설 속 주인공이 죽음을 바라는 대상은 어려운 시절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옛 은인이다. 하지만 피곤함과 몇 가지 불편함 때문에 주인공은 무심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라고 반문할 정도로 간절히 어르신의 죽음을 바란다. 나 역시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다. 죽음으로 ‘완성된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의 논문을 쓰고 싶어서 좋아하는 작가의 노벨상 수상보다 죽음을 바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그때의 언행이 오싹한 것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나는 언제부터 나의 작은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죽음이나 불행을 바라게 되었을까?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각박해진 나의 모습을 되짚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기호 작가의 작품은 이 단편집을 통해 처음 읽게 되었다. <수인>. 산골에 처박혀 소설을 쓰느라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해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는 소설가의 이야기다. 작품 속 소설가는 다른 나라로 떠나기 위해(자신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서점의 두꺼운 시멘트벽을 기약도 없이 곡괭이로 부숴야 한다. 평소 같았으면 다소 식상한 비유라 촌스럽다 여겼을 테지만,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계속 의심하면서도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는 소설가의 모습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이든 만 시간을 반복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둥의 자기계발서식 문장은 이제까지 내가 혐오하던 유의 얘기였다. 나는 그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어, 불어도 못하고, 배관기술이나 병아리 감별 자격증, 대형운전면허와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도 없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책 만드는 일밖에 없는 나에게 소설에서 곡괭이로 시멘트 벽을 부수는 소설가의 모습은 위로와 격려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오싹하고 치열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다면 지금 하는 일을 진작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고단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던 힘 또한 담겨 있다. 김중혁 작가는 예전 김연수 작가의 친구로 소개되던 때부터 좋아했다. 단편집에 실린 <엇박자 D>는 읽을 때마다 H20의 <오늘 나는> <고백을 하고>를 흥얼거리게 된다. 남들과 다르기를 갈망하면서도, 또래 속을 떠나지 못하던 사춘기 시절, 내게도 ‘엇박자 D’ 같은 동급생이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나름 학교에서 유명한 음악 매니아였다. H.O.T를 필두로 소위 아이돌 문화가 시작된 시기였지만, 다른 애들과 다르고 싶었던 탓에 그런 음악은 시시하게 여겼다.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일본의 음악들과 서양 밴드들의 음악, 아니면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추천해준 인디 음악 CD를 몇 십장씩 가지고 다니며 들었는데, 어느 날 반에서 ‘이상한 애’로 낙인찍혀 있던 아이가 아는 척을 해 왔다. 그 애는 항상 ‘삐삐 롱스타킹’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다니고 항상 양 볼을 붉게 화장하고 다녀서 반 아이들이 약간 ‘또라이’ 취급을 하던 애였다. 그 아이의 쓸모는 학급별 장기자랑을 할 때뿐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자우림 노래를 아주 그럴싸하게 잘 불렀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좋아하는 가수나 노래에 대해 이야기를 걸어 왔지만,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항상 거리를 두었더랬다.

그런데 몇 년 전 신문에서 그 아이를 ‘홍대 여신’ 중 한 명으로 소개하는 기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모질게 굴었던 내 행동에 대한 미안함이 ‘이 아이한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상쇄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 아주 멋져 보여서 저절로 응원하고 있다. (나중에 노래를 들어보니 내 취향은 아니어서 ‘가수’만 응원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음악은 내 생활의 활력소다. 출퇴근 시간이나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라디오나 CD 플레이어를 켜두기도 하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찾아다닌다. 공연장에서 듣는 음악은 ‘그때 거기’에서밖에 들을 수 없어서 더 특별하기 때문이다. <엇박자 D>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소설 속 가상의 공연장의 그 고조된 분위기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또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그 친구와 재회한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제법 따뜻해진다.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읽고 나면 마음이 답답해지는 어둡고 무거운 소설이 대부분이지만 가볍고 밝은 것들도 섞여 있어 내 인생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길고 큰 고통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즐거움. 모르고 지냈던, 혹은 깜박 잊었던 나 그리고 우리의 모습들을 책을 읽는 동안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런 게 소설의 힘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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