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지서(五車之書) 정도의 책이 전부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 목록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빠진다. 하지만 다섯 수레의 책이라니! 적어도 너무 적다. (요즘에도 많은 사람이 다섯 수레의 책도 개인이 소장하기에 넘치는 분량이라 생각하겠지.)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단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평생 다섯 수레의 책만 가질 수 있다면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어떤 책을 버리고 간직할 것인지 고민할 성 싶다.
『장서의 괴로움』에는 보통사람들의 눈엔 괴짜일 뿐인 장서가들이 다수 등장한다. 수만 권에 이르는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집이 무너질 위험에 놓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따로 장서고를 마련한 사람도 있다. 책을 읽고 나서 우리 집에 있는 책들을 대충 헤아려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삼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을 대량으로 버린 적이 없으니, 이 책에 소개된 장서가들 앞에선 명함을 못 내밀지라도 어느 정도 책이 있는 편이다.
가장 많은 책은 역시 전공과 관련된 일본문학이나 문학이론서들이고, 뒤를 이어 세계문학, 인문, 만화책들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그림책은 침대 머리맡에, 중고등학교 시절에 정기구독했던 스크린, 로드쇼, GMV 등의 잡지류는 박스에 차곡차곡 담겨 지하실에 잠들어 있다(나중에 잡지박물관에 기증할 때까지 보관할 셈이다). 다락방에는 아버지의 오래된 책을, 자취를 시작해 집을 떠난 동생의 빈 방에는 다시 찾아 읽지 않을 것 같지만 처분하기엔 아까운 책들을 박스에 담아 두었다. 이게 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회사에도 대략 대여섯 박스의 책이 있는데, 집에는 더 이상 보관할 곳이 없어 시간이 날 때마다 정리해 동생 집에 보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넘쳐나는 책들을 처분할 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들이 책을 처분하는 데 주저하게 한다. 우선 내가 가장 분개하는 기억은 서평 블로그를 운영하던 때, 무료로 나눠주었던 만화책을 받자마자 다시 팔려고 내놨던 사람이다. 친구의 이름을 빌려 그 책을 되사들였을 때 느낀 그 씁쓸한 기분이란. 공짜로 받은 책을 바로 되파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메일을 보냈다. 본인이 누구보다 빨리 댓글을 다는 수고를 들여 얻은 물건이니 어떻게 처분하든 상관 말라는 답장을 받고선 다시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책을 주지 말자는 결심을 했다.
다음으론 마니아들이 자주 이용하는 일본의 한 헌책방 체인점(북오프)을 찾았을 때 겪은 경험 때문이다. 친구와 둘이서 약 80권 정도의 책을 나눠들고 어려운 걸음을 했지만, 마지막에 내 손에 떨어진 대가는 5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같이 고생한 친구에게 밥과 후식을 대접하니 그마저도 없어졌다. 찢어지거나 구겨지지 말라고 특별히 커버까지 씌워가며 보관했던 책이었는데 표지에 찍힌 자국이 발견될 때마다, 모서리에 구겨진 흔적이 발견될 때마다, 아니면 띠지가 약간 찢어졌다고, 책머리가 빛에 오래 노출되어 변색했다고, 어떤 책은 특별선물을 받기 위해 책 안의 쿠폰을 오렸다고 감정가가 깎였다. 나름 정성들여 보관했던 책인데, 전문가의 눈은 역시나 엄격하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불쾌했던 경험 이후로 헌책방에 책을 파는 일도 극히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내 경우는 ‘장서의 괴로움’이 아니라 ‘처분의 괴로움’이 아닐까? 책을 처분할 때마다 이렇게 괴로운 일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처분하지 않으리! 장서의 괴로움보다 처분의 괴로움이 더 크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 이후로 웬만하면 한 가지라도 장점을 발견한 책들은 처분하지 않고 손에 쥐게 되었다. 한 가지 장점이란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이다. 어떤 책은 표지나 본문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어떤 책은 표지는 별로지만 번역이 좋아서, 좋아하는 작가나 삽화가의 책이어서, 면지의 무늬가 예뻐서, 내용이 재미있어서 등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아직 통장 잔고가 바닥나거나 얹혀살고 있는 부모님께 한소리 듣지 않고 있으니 나의 장서 라이프는 즐거움뿐이라 단언해도 영 과장은 아닐 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오래된 책 때문에 즐거웠던 적이 꽤 많다. 고서점 거리로 유명한 일본의 진보초를 돌면서도 못 찾았던 전공 작가의 완벽한 전집을 교토의 한 헌책방에서 찾아냈을 때(책이 담긴 박스에도 흠집이 없었던 데다 박스에 흠집이 나지 말라고 싸놓은 기름종이도 찢어지지 않고, 안에는 무려 당시의 광고지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이제는 절판된 책을 발견하거나 표지가 바뀌기 전의 초판을 구하기라도 하면,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양 가슴이 벅차다.
몇 년 전, 법정 스님이 타계하셨을 때 전국의 헌책방에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무소유』를 비롯해 본인이 집필한 모든 책의 판매를 중지한다는 유언이 발표되자, 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뉴스를 접한 후, 혹시나 해서 아버지 책이 보관된 다락에 올라가보니, 『무소유』가 있었다! 그 일로 아버지가 다시 보일 정도였으니 그 감격은 참으로 대단했다. (책의 내용과 반대되는 현실이 부끄럽긴 하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나는 복각판을 좋아한다. 구하기 힘든 (그리고 비싼) 고서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복제판을 기획해 출판한 책을 말한다.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모든 책을, 그리고 모든 페이지를 수작업으로 만들다 보니 많은 부수를 찍어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책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웃돈이 붙어 보통사람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값이 뛴다. 나 같은 서민에겐 복각판은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다.
그러고 보면 진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는 기꺼이 자신의 책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본디 책이라는 매체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자 펴낸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나 역시 책을 사 모으는 데만 집착하는 본말전도의 상황은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평생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쌓아두기만 하다가는 몇 십 년 후엔 지적 허영만 가득찰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접할수록, 많이 가질수록 나름의 식견이나 취향도 생기기 마련이다. 책을 즐기는 방법은 읽는 것뿐만이 아니다. 부디 『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즐기는 자기만의 방법을 깨칠 수 있기를. 책과 함께하는 문화가 두터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