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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이 온다
  • 한강
  • 13,500원 (10%750)
  • 2014-05-19
  • : 961,098
 

내 나이 서른셋. 몇 년 사이에 큰엄마, 할머니, 작은아빠, 외할아버지께서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해가 거듭될수록 장례식장에서 더 이상 허둥대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죽음에 조금은 익숙해진 듯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한 달 전 갑자기 막내 사촌동생을 잃고 나서, 누군가를 잃는 슬픔에도 경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날이 창창하던 사촌동생의 죽음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상을 치르는 내내 어린 학생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작품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넋두리가 자꾸만 작은아버지 내외의 눈물과 겹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주는 이해는 하지만, 공감까지는 할 수 없는 역사였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당사자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가장 억울한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 우리가 그들의 슬픔이나 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가 울고 화내봤자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회의도 조금은 있었다.

개인의 거리를 중요시하는 나의 별난 성격 탓에 이런 생각을 한지도 모르겠다. 너와 나, 안과 밖 사이에 벽을 두지 않으면 불편했다. 연애를 할 때나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인지 올봄에 읽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어느 작가의 고백(“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공선옥, ASIA 32호)에도, 역시 끔찍한 고통과 어마어마한 불행만이 작가를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는 법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뿐이다. 그때까지 그들의 고통은 나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책을 읽을 때 역시, ‘우리’를 얘기하는 데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던 적이 많다. 과연 ‘우리’란 게 존재할까 싶었다. 그러다 어느 인터뷰에서 “산 자가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이 소설(『소년이 온다』)이 시작된 것 같다는 한강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제야 죽음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죽은 자는 산 자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자주 보고 겪어 왔으니까. 하지만 작가는 그 반대의 경우,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구원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 소설을 쓴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소설에는 정작 죽은 사람의 이야기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우리는 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가? 다시 읽었을 때, 이 소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작가의 모색이라 여겼다.

사촌동생의 장례식장에서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제발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사이에 놓인 죽음이란 벽이 너무 높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동안 굳건했던 너와 나 사이의 벽은 착각의 산물이었음을 이제 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플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큰 고통을 겪은 뒤에야, 사랑하는 너를 잃은 뒤에야 ‘우리’가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렇게 사촌동생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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