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청개구리로 유명했다. 가족들이 말을 걸면 듣지도 않고 ‘싫어’, ‘아니’로 대답하고, 좋아했던 가수도 인기가 높아지면 꼴도 보기 싫어졌다. 많은 관객이 들었다고 뉴스에 소개되면 아무리 보고 싶었던 영화라도 시시해진다. 그러니 남들이 꼭 읽으라고 하는 책도 안 읽었다. 그렇게 논어를 읽지 않은 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철이 들고 나서부터 친다면 말이다). 몇 년 전, 아직 논어를 읽지 못했다는 나의 말에 한 선배가 당황한 표정으로 “원문으로 읽지 않았다는 말이겠지?” 하고 되물었던 적이 있다.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냥저냥 넘겼더랬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부터 단단히 쌓아 온 반항심 때문인지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괜히 공자의 가르침에 태클을 걸고 싶어졌다.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은 가족, 자기 사람만 챙기라는 뜻인가?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정치를 한다는 거지? 그래놓고 나중엔 왜 가까운 근심보다 먼 근심을 하래? 모순투성이잖아.’ 만약 내가 춘추시대 공자 제자였다면 너 같은 바보는 필요 없다며 진즉 쫓겨났으리라. 공자 말씀도 의심하는데, 저자 말이라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짧은 한문 실력으로 책 읽는 내내 해석을 의심하며 원문을 읽어보겠다고 나서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 머리와 마음을 때리는 문장들이 참 많았다. “문으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와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그동안 싸구려 동정심으로 위선을 행하던 나의 모습을 반성했다. 그동안 나의 문제점이라 여기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구절을 발견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이밖에도 “朋友數 斯疏矣[붕우삭 사소의]” “惡不孫以爲勇者[오불손이위용자]” 같은 말들은 버릇없고, 예의 없는 내가 머리와 가슴에 깊게 새겨둘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아무리 청개구리인 나라도 적어도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이 읽고, 좋아하고, 추천하는 책은 믿고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이 책, 『좌파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오래된 것을 믿고 또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오래된 것을 배척하고, 새로운 것을 쫓기 바쁜 분위기에선 다소 구닥다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생각이 맞다. 오래된 책들은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一以貫之)”. 읽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읽을수록 다른 묘미를 느껴 곁에 두고 여러 번 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은 ‘영원한 신간’이다.
책 읽는 데 좌파, 우파 따위의 구분이 중요할까? 전공 학자들이 보면 황당무계하겠지만, 나는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有敎無類)”는 공자 말씀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하고 싶다. 좋은 책을 두고 내 책, 네 책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다(애초에 편을 나누어 읽어야 하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남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소인들은 좌파 우파를 떠나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들에게 『논어』를 한 권씩 선물해 주고 싶다.
+) 뒤표지 첫줄은 잘못된 거겠지? ㅜㅜ 처음에 책 받아보고 완전 헷갈렸음.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뒤표지 첫줄)
->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