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몽드디플로마티크코리아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잡지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지난 8월 주말마다 하루 3시간씩 영화 비평 수업을 들었다. 매주 새로운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작성한 후, 다른 수강생들과 서로가 쓴 글을 돌려 읽으며 의논하는 식으로 수업이 이어졌다. 분명 매 주차 같은 영화를 봤어도 각자 다른 지점을 포착하고 자신만의 논지를 전개하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내가 간과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간 장면에 천착하는 경우를 보면 놀랍기도 했다. 글을 쓸수록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막막해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의 글을 그렇게 열심히 읽고, 또한 남이 나의 글을 그렇게 시간을 내서 첨삭해주는 일이 좀처럼 없기에 무척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배우고 느낀 것이 이번 비평문 모음집을 읽는 데 도움이 됐다.
영화에도 문해력(literacy)이 필요하다는 서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예술보다도 자본과 인력이 많이 투입되는 이 장르를, 그저 영화관 좌석에 앉아 상영 시간이 끝날 때까지 다 보는 것이 곧 그 영화를 이해했다는 걸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사이에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저 수동적인 수용을 넘어 왜 이런 장면 전환이 있는지, 이런 장면은 중간에 왜 삽입됐는지, 회면비가 바뀌는 이유는 무엇인지, 카메라는 왜 이 각도에서 이 화면을 보여주는지 같은 것을 곰곰히 따져보는 게 적극적인 영화 감상 태도일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대부분 주관적인 생각과 경험, 감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영화가 좋거나 싫다고 하는데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체로 어떤 영화가 ’잘‘ 만들었는지, 또는 어떤 영화가 ’잘못’ 만들었는지 곧잘 동의한다. 사람마다 내세우는 근거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는 기준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 비평에 속성이 있다고 본다. 주관적인 감상을 넘어 다른 이들이 납득하도록 객관적인 기준으로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것, 바로 여기에 비평의 의의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결국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한다면 의미가 퇴색한다. 카프카나 고흐 같은 예술가는 살아 생전에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을 오늘날 같은 반열에 올려둔 데엔 비평의 역할이 무척 컸다.
비평을 읽다가 스포일러를 마주할 수도 있어서 우선 내가 본 영화들에 관한 글을 먼저 읽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한 상반된 견해가 눈에 띈다. 영화는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엔딩 시퀀스에서 오늘날 오시비엥침 추모기념관을 연결한다. 이 대목에 관한 평가가 나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재현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곧이어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일상의 미묘한 변주, 그 속에 담긴 각종 올드팝의 활용, 코모레비가 의미하는 바 역시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줬다. <추락의 해부>에 관한 대담은 내가 들었던 영화의전당 해설 이상으로 영화를 해체해줬다. 스눕과 다니엘 중 어느 존재의 시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산드라의 살인 의혹 여부를 다르게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거의 전작을 관람한 크리스티안 페촐트에 관한 개괄도 기억에 남는다. 연이은 3부작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 그가 차기작에서는 또 어떤 주제와 인물, 그리고 플롯을 가지고 올지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