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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이님의 서재
노동이 없는 하루는 길고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간 노동의 피로로 누르고 있던 불안과 망상들이 내 속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가장 한심한 생각은 내가 과거에 어떤 행동을 했다면 현재에도 한지와 잘 지낼 수 있었을까 하는 망상이었다.

한지가 밤중에 산책을 하자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같이 걸었다면 어땠을까. 한지가 내 노트에 자신의 이야기도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냥 솔직히, 내가 쓰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너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그애가 살리지 못했던 동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을때, 당황해서 침묵하지 말고 ‘그건 네 탓이 아니야‘라고 위로해줬더라면 어땠을까. 민달팽이의 기원 따위를 떠벌릴 시간에, 그애가 나에게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를 줬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나의 그 단순함이 그애를 숨막히게 한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자주 그애를보려 했던 건 아닐까. 그애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시간을 내가 독점해서 나에게 질려버린 건 아닐까.

침묵은 나의 헐벗은 마음을 정직하게 보게 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고 싶지 않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 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 도 한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한지와 영주, 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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