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신뢰할만한 슬픔
mango 2018/09/2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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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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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2018-09-22
: 31,165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주 잠깐, 짧은 인상만을 적어두려고 한다.
신형철의 4년만의 신간이 나왔고 반쯤 읽었다. (사실은 거의 다) 서문부터 뭔가 달라졌다고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그게 뭔지는 알지 못했다. 글쎄 뭘까, 전보다 철학적/이론적 예시를 덜 가져오는것? 호흡이 조금 더 차분해진것?
특정 지면을 통해 발표한 글들을 추합한 부분이 섞여있다보니 그 지면의 특성을 따라간 글에선 다소 그런 기분을 느낄수 있으리라. 본질적인게 바뀐게 아니다. 본질은 똑같이 흐르고 마치 호흡이 낮아진 것처럼, 더욱 깊은 숨을 쉬는 글들이 책속에 흐른다. 정확한 글을 쓰고싶다는 소망에 따라 그의 글들은 점점 문장이 짧아지고 때로는 해야할 말을 뒤로 삼킨것 처럼 분절된 공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신형철이 정확하게 쓰려 할수록, 그래서 어떤 ‘인식’의 표면을 손 끝으로 마주할수록 나는 점점 더 정확하지 않은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온당한 부정확함이다. 비정확함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내면에 깊이 다가갈수록 (내면의) 많은 갈래와 빛깔 균열과 파동에 사로잡힌다. 우리 각자의 내면을 구성했을 삶의 모습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게 말하고자 한다면 한없이 쉽게 정의 할수 있는것도 삶이다. 모든 인간에게 한번씩 주어지는 보편적인 경험이므로.
그러나 그 무수히 많은 삶의 균열들에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몰라도- 틈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갈라진 틈새들이 개별적으로는 정의될수 있어도 포괄적으로는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더 나아가 그 비정확하게 벌어진 틈새들이 인간 모두에게 정확히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의 글들은 다른 방식으로 ‘정확성’에 도달하는 중이라는 걸 신형철은 논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확함을 ‘실험’하리라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 이후 4년이 지났다. 그는 이제 실험에서 ‘공부’로 옮겨왔다. 공부란 아무리해도 정확한, 정의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는 과정의 영역이란 걸 그가 몰랐을리 없다. 나는 이 불가해한 내면과 삶 앞에 오로지 그 비정확성에 더욱 깊게 닿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언된 정확성이, 그래서 슬픔을 공부하는 자의 슬픔으로 무한히 가까워질 뿐일 그의 정확함을 신뢰한다. 신형철의 글은 이런 식으로 제출되어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바로 그런 감정으로 그의 글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 산문집인 <느낌의 공동체>를 읽을때보다 더 많은 한숨과 더 느린 속도가 필요했다. 마구잡이로 흘려버리는 눈물이 아니라 목 뒤로 꿀꺽 삼켜버리고 메이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그렇게 읽히도록 정확하게 고안된, 그런 신뢰할 만한 슬픔을 그는 이번에도 들고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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