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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잘남>은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지성사에 관한 연구 결과이다. 저자인 양승태 교수는 호메로스, 아르킬로코스, 탈레스, 피타고라스, 그리고 소피스트까지 이어진 그리스 지성사의 전개를 미토스가 에포스를 거쳐 로고스에 이르렀다가 레토라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토스는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일의 언어를, 에포스는 자아 의식의 언어를, 로고스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능동적인 인식 및 작용의 언어를, 레토라는 다른 인간의 언어를 의식한 외부로 향한 표현의 언어를 각각 표상하기 위해서 저자가 사용하는 명칭들이다.


앎의 형상과 잘남의 상호연계
역사에 관한 모든 서술에서는 예컨대 잡다한 사실의 더미 사이에서 어떤 것을 하나의 “흐름”이라고 확인할 것인지, 다양한 일과 물건들 사이에 무엇을 “관계”로 인식할 것인지, 나아가 그렇게 인식된 관계들 중에서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길 것인지와 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서술자의 가치나 시각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역시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언어를 통해 앎(sophia)에 관한 하나의 형상(idea)을 포착하고, 나아가 현실에서 잘살아 가는 일과 앎 사이의 연관을 이해하게 된 것을 지성사에서 하나의 경이적인 발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앎의 형상과 잘남(arete)의 형상을 상호 연계시켜 이해하면서 앎과 잘남을 추구하게 된 상태가 그리스 지성사에서 정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소피스트에 이르러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의 진정한 발전이 아니라 외부로 향하여, 남을 무조건 압도하고 남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정신활동의 역사”로 전락하였다고 한다. 저자의 의식 안에서 이러한 지성사의 전락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발견되는 “지성의 빈곤”과 자연스럽게 결부되어 있다. 이처럼 전락한 상태의 지성과 관련하여 논의되어야 할 관건은 곧 정신과 분리된 말이 어떻게 다시 그 주체로 돌아와 진정한 자아를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곧 “현실 속에서 잘남을 위한 경쟁의 표현인 타인의 언어에 대한 압도가 과연 진정으로 무엇을 위한 압도이고 무엇을 위한 경쟁이나 투쟁인지”를 묻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결국 “‘자기 자신’은 무엇인가”, 즉 자아의 정체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지는 지적 탐구가 지성의 회복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투쟁을 할 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 중에 어떤 편이 나을까? 이 역시 결코 하나의 표준적인 정답이 있을 수는 없는 질문이지만, 대체로 목적을 알고 하는 투쟁이 모르고 하는 투쟁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애당초 투쟁의 목적이나 초점을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립성 논란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런 질문이 제기될 때 각각의 투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관해서 확정적인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은 전형적으로 가치와 가치 사이에서 각 가치가 자기 확장을 시도할 때에 발생하는 다툼에 해당하는 것이다.
누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든지 하나의 투쟁에 관해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보편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발가벗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를 투쟁의 쌍방 당사자들이 스스로 캐묻는 상황은 - 자의식의 매개 없이 벌어지는 발가벗은 투쟁과 비교할 때 -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에 관한 정답 겨루기라고 하는 (그리고 대개는 지능의 우열이라고 하는) 새로운 쟁점이 덧붙여져 투쟁의 갈래가 더욱 복잡해지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앎과 실제 삶 사이의 관계가 결코 일률적일 수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책은 서술에서 본질과 현상에 관한 헤겔 식 구분이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정신의 자아 회복”이라는 문구에 대해 시비를 걸자면 자아와 정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지, 회복되기 전의 자아(또는 정신)와 회복된 후의 자아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정한 자아인지, 애당초 자아를 회복한 정신과 자아를 회복하지 못한 정신을 분별하는 일반적 표준은 무엇인지 등을 물을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서 눈앞이 확 트이도록 표준적 주해서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나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한국지성계, 소외 극복 등 과제
자아와 관련한 재귀적 언어들, “제 정신을 찾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다”, “소명을 알아차리다”, “계시를 받아, 본성의 울림을 통해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다” 등의 문구들은 각기 어떤 개별적인 맥락에서 서술 대상인 개인이나 행태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표현이다. 개별적인 맥락으로부터 사상하여 마치 “자아 회복”의 표준적인 이상형이 보편적인 언어로써 일반화될 수 있는 듯한 방향으로 논의하는 순간 그때까지 남아 있는 모든 알맹이들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회화 작품에 대해서 “진품”을 운위하는 상황이란 예컨대 김홍도나 박수근이나 세잔의 특정 작품을 앞에 둔 상황을 말한다.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이라는 개별적인 맥락이 없는 상태에서 그 모든 개별성을 사상한 형태의 “진품”이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 지성사의 전개와 한국 지성의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저자는 한국 지성의 빈곤과 한국 대학의 위기를 지적하며 한탄하고 있다. “정신의 자아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성에서 빈곤한 것이 무엇인지, 한국의 대학이 어떤 점에서 위기인지를 묻는 일이 한탄보다 앞서야 할 것 같다. 한국 지성계의 “소외”라든지 “서구중심주의”를 고발하거나 질타하는 목소리는 자주 들리지만 막상 그것을 극복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여전히 요원한 과제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까닭도 이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실제 삶과 직결되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실존의 차원에서 우러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에 지성이 투자되지 못하고 단지 수학적인 도식에 의해 구성되는 일반관념을 준거로 삼아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모든 일들을 “빈곤”과 “위기”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소외의 결과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그리스 지성사에서 찾아내고 있는 미토스 - 에포스 - 로고스 - 레토라라는 흐름에 관해 메타 비평 한 마디를 덧붙이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 선행하는 사회 형태의 순서로 가족-씨족-부족을 상정하는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a) 국가도 부족도 씨족도 없이 가족만 있던 상태, b) 가족과 씨족은 있고 부족과 국가는 없는 상태, c) 가족, 씨족, 부족은 있지만 국가는 없는 상태, d) 가족, 씨족, 부족, 국가라는 개념들이 모두 지시대상을 가지는 상태 등 4가지 유형의 상태를 직접 또는 간접 증거를 통해서 관찰하고 나서 국가의 출현이 가족-씨족-부족-국가의 순서로 이루어졌다고 귀납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사실 경험적인 어떤 증거와도 상관없이 다분히 그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의 그림자로부터 구성된 것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고한 것이다. 그 보고가 역사적 사실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익숙한 언어의 그림자에 해당하는지 따질 능력도 관심도 없었던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수용됨으로써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가족과 씨족과 부족과 국가 사이에 어떤 발생학적 순서가 있어야 한다면 그 순서는 우리가 속해 있는 관념의 체계 안에서 당연히 가족-씨족-부족-국가일 수밖에 없다. 국가가 가족보다 선행한다는 식의 명제는 전형적인 “말이 되지 않는” 소리일 뿐,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를 사료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경험적 가설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 또는 자연계의 사실이라고 믿는 많은 발상들이 사실은 이런 언어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하는 르네상스 이래의 진보사관 역시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신화에서 로고스로” 지성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도식 역시 실제 역사의 증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신화 다음에 이성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계몽주의적 역사철학에서 무의식적으로 연역된 명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낳고 있다.

한국 지성계에 대한 발언 구체적이어야
이 책이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고, 그 시대의 “실상”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들이 거의 모두 근대 이후의 서양 계몽주의의 인도를 받은 시선 및 테크닉에 의해서 발굴되고 수집되고 정리되었다는 점을 감안할지라도 특정 이론이나 이념과 무관한 “역사의 증거”를 그 시대 그리스에 관해서 찾아낸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저자에 대해서 궁금한 점은 과연 저자 본인은 자신의 기획을 어떻게 자리매김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저자처럼 한국의 지성에게 어떤 특별한 민족적 정체가 있어야 한다고 할 경우 특히 심각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만약 <앎과 잘남>이 저자의 가치와 상관없이 고대 그리스 지성사를 사실적 증거에 입각해서 서술하고자 한 결과라면- 무엇을 사실로 보고 무엇을 증거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이치(logos)가 현대 서양의 고전학계에게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앎과 잘남>은 현대 서양의 고전학계에서 통용되는 이치를 한국 지성의 내면으로 수용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만일 이 책에서 이루어진 탐구가 (한국 지성계에 대해) 저자가 내놓고자 하는 실존적 발언에 의해서 인도된 것이라면, 그 실존적 발언이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르네상스 이래 서양의 계몽사조가 고대 그리스의 지성을 현창한 배경에 깔려 있던 실존적 관심이 모두 하나의 일관된 체계 안에 통합되어야 할 이유는 물론 없지만,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실존적 입장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현실 속에서 탁월함(arete)의 표준 하나를 제시하는 것과 같다. 그때 탁월함이란 하나의 보통 명사에 대한 일반적 정의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예의 형태로만 표상되고 구현될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박동천 / 전북대·정치학



필자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소크라테스의 동굴의 비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근대정치사상의 토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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