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붉은구름님의 서재
  •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 최의택
  • 15,120원 (10%840)
  • 2023-10-10
  • : 490

▶▶▶▶▶ 여기까지 당도한 분들을 위한 QnA

Q 1. 1991년생 SF 작가 최의택의 습작기가 그렇게 재미있다더라. 

▶ 알라딘 미리보기 22~29쪽 <아임 소 소리, 존>을 읽어보세요. 진짜 재밌음. 


Q 2. 대충 어떤 내용일까?

▶ 알라딘 eBook 미리보기 6~16쪽 프롤로그를 읽어보세요.


>Q 3. ≪슈뢰딩거의 아이들≫을 잘 읽긴 했는데 이건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주요 소재가 장애라면 너무 무겁지 않으려나. 

▶ 알라딘 미리보기 12~21쪽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을 읽어보세요. 어림잡아 그 정도의 무게와 온도입니다. 미리니름 하나 하자면 생각지도 못한 뭔가가 날아올 때가 있기는 있어요. 독자들은 그가 미래에 시도할 '탈출 계획'을 반강제로 공유하게 될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 '언어'라는 틀 안에 있는 세상 

약 20년 전, 크레파스와 색연필 빛깔을 나타낼 때 흔히 쓰였던 '살색'이란 용어가 '연주황'을 거쳐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이 일은 내 머릿속에 이상하리만치 뚜렷한 모습으로 남았다. 집 밖을 나서면 바로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살았는데, 이 소식을 들었던 날 매일 보는 어린이들이 꽤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실제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건만, 이 아이들은 내가 어릴 때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거라는 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더하여 말과 글과 언어에 담긴 함의를 세상 모두가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내가 '장애우'란 단어의 생성과 쇠락을 자세히 기억하는 것도 아마 그 일 덕분일 것이다.



▲ 네이버 데이터랩으로 살펴본 2016~2022년 장애인, 장애우 검색 트렌드 



애초에 '장애자(불구자)'라는 표현이 있었으나, '놈 자(者)'에 대한 거부감도 컸거니와 1989년 장애인 복지법이 개정되며 중립적인 '장애인'이 널리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장애우(友)'라는 말을 만들었고 실제로 이 단어도 이천년대 초중반 상당히 널리 쓰였다. 장애인 대신 장애우란 말을 사용하자고,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학교교육을 받은 나 같은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어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왜 많은 이들이 친근하게 느꼈던 '장애우'는 '장애인'과 달리 법적·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어가 되어가고 있을까? 장애를 가진 많은 당사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미상 타인이 그렇게 지칭할 수 있을 뿐, 장애인 본인이 스스로를 장애우로 부를 수 없는 의존적·비주체적 단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우리를 친구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장애인들의 말은 왜 언어가 사회적 약속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언어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약속이어야 하는가. 그 약속은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가. 



한국이 살색, 장애우, 코시안(Kosian, Korean + Asian) 같은 단어들로 여러 혼란을 겪던 시기, 나는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좀 정리된 상태 아닐까 하는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장애를 '개개인의 신체 특성과 그가 살아가는 사회의 특성이 상호작용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 걸 보고 충격을 받았으니 그런 환상을 품을 만도 했다. 해서 2008년판 콜린스 코빌드 사전을 펼쳐보니 disabled 항목에 이런 서술이 달려있었다. 

장애인을 가리키는 형용사로는 handicapped보다 disabled, physically challenged, differently abled가 더 선호된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이들을 가장 신중하게 지칭하는 표현은 people with disabilities 또는 people with special needs이다. 




▲ 구글 엔그램으로 살펴본 handicapped의 1980~2019년 사용 빈도. 

책이야말로 실제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구글 엔그램은 신문과 잡지를 제외한 책 본문만을 빅데이터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언어-개념-문화의 시대적 진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1957년 발간된 ≪A Dictionary of Contemporary American Usage≫에서는 'handicapped children'이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되어있지만, 이제는 어느 사전이든 handicapped를 '구식이고 무례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인식도 제각각인지 다른 책을 뒤지거나 구글링을 해보면 꽤 말이 다르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양한 표현들을 받아들이는 감각도 변화를 거듭해왔다. 직설적인 disabled를 가장 부정적이고 구식인 말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완곡하게 돌려말하는 challenged와 differently abled가 더 나쁘다는 의견이 있고, with special needs는 우리말의 장애우와 마찬가지로 비장애인들의 시점에서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2018년 평창 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disability 대신 impairment를 쓸 것을 권고했다. 장애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이는 자주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이며, 2020년대로 가까워지면 '사람 우선 언어 person first language'에 대항하는 '정체성 우선 언어 identity first language'라는 개념이 확고해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장애인이 자신을 사람 우선 언어로 소개한다면

'나는 장애가 있는 사람(person with difficulty/disability)이에요.'라고 말할 것이고, 

정체성 우선 언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장애인(disabled person)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눈치챘겠지만 사람 우선 언어의 경우 당연히 장애(혹은 진단명)보다 person이 앞에 위치한다. 이 2가지 발화에 온갖 사회적·의료적 맥락이 뒤엉켜 있으며, 장애는 인간이 가진 한 가지 특성일 뿐 전부가 아님을 주장하는 전자야말로 소외와 비인간화를 피한 중립적 묘사라는 목소리가 컸다. 반면 후자를 취한 사람이 전자를 향해 장애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거냐며,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다루는 일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 드는 행위 아니냐며 일갈할 때도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거칠게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사람 우선 언어가 우선적으로 권장되었지만 이제는 개개인의 의사에 맞게 스스로 채택한 언어도 함께 존중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많다.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에 대해 이토록 길게 쓴 이유는,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이 내게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해서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현재 작가 최의택은 자신의 언어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는 여정 한가운데에 있는 중이다. 




▶▶▶▶▶ 글쓰기가 가장 만만한 소설가의 하루하루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최의택과 달리 수필은 내게 난감한 영역이다. 피천득이 아무리 수필을 예찬해도 국어 시간에나 시험을 치를 때나 늘 수필 쪽이 제일 재미가 없었다. 일상을 다룬 웹툰은 신나게 웃으면서 보는데 수필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쓴 에세이는 더욱 난처하다.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 않는 한 소설가의 개인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심한 독자인 걸 어떡하겠나. 신간을 앞에 두고 '저어... 새 소설은 언제쯤 나오나요?' 같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그래놓고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을 잡은 건 여기에 소설 뒷이야기가 가득 실려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감독과 배우에게 영화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작가들이 작정하고 자기 글을 주제로 삼아 수다를 떨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말해줄 때 들어야 한다. 



나는 최의택 작가를 로켓 앤솔로지 단편으로 처음 알았고 그 소설 제목이 ≪나의 탈출을 우리의 순간들로 미분하면≫이어서 그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정작 그는 EBS 고등수학 강의 오리엔테이션을 듣자마자 곧 중학수학으로 노선을 바꾸었단다. 캐릭터 작명을 잘하는 작가라고도 생각해왔는데 습작생 시절에는 주인공 이름을 '존'으로 지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염없이 까인 전적이 있었다. '핑' 던지면 '퐁'하고 날아오는 대사들이 최의택 소설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전에는 왜 인물들이 말을 안 하냐는 피드백을 받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랩을 따라불렀다는 일화를 읽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무미건조하게 옮겨 쓴 이 에피소드들은 실제 책에서는 정말 생기발랄한 어투로 이야기되며, 최근 들어 뭔가를 읽고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다. 내가 장애인 작가의 일상 에세이를 읽는 중이라는 걸 아는 가족이 거기 그렇게 웃을 얘기가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다. 진짜 '재밌고' 작가가 '나대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는 내 말에 가족이 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말 해도 돼? 

42쪽

문장이나 대화, 인물에 대한 칭찬은 나를 일어나 춤추게 했다(말이 그렇다는 거다).



창작자들은 만들기만 할 뿐, 완성되고 나면 해석은 작품을 보고 듣고 읽는 자들에게 달려있다. 그럼에도 별점과 댓글과 리뷰를 뒤지다 말고 실제 쓰고 그리고 연기하고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찾게 된다. 그러나 보통 '작가의 말'은 길어봐야 몇 페이지에 불과하지 않나. 그러니 최의택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역시 덕질을 해본 작가라 그런지, 독자가 알고 싶어하는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풀어준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은 주로 무얼 읽는지, 그가 글을 '어떻게(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쓰는지, 특정 소재와 장르를 고르게 된 연유는 뭔지. 최초의 아이디어가 완성을 향해 다가가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작가는 주로 어떤 피드백을 취하고 편집자는 구체적으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작가의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작품에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왜 어떤 주제에 천착하게 되는지. 소설가는 인물을 어떻게 조형하는지 왜 특정한 개성을 가진 주인공이 특히 작가에게 쓰기 편한지. 글을 쓴다는 것이 작가에게 밥벌이와 자아실현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렇게 물음에 물음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가다 보면 기어코 닿게 되는 것은 저자 최의택, 자신의 이야기이다. 



소설이 현재의 그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삶과 과거와 육체도 최의택이란 존재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도 말하게 된다. 




▶▶▶▶▶ 나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 

태어나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이 평생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온 최의택이지만 자신의 장애명은 외우지 못했다. 펜을 들고 책장을 넘기는 것조차 버거워질 무렵 그는 고등학교에서 자퇴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휠체어를 그의 연장된 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주었던 최초의 친구들과 한참 멀어진 채, 그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깊게 의식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장애로부터도 격리된다. 그러나 그가 문학상을 받고 세상에 등장하자마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모아 물었다. "장애명이 뭔가요?"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거의 잊고 사는 것에 성공했던 장애를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다 들이댄 것이다. 그동안은 그저 타인과 대면하지 않았기에 대상화될 일도 타자화될 일도 없었던 것뿐이었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는 그리운 유년기와 결별한다.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최의택으로 살 수 있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있었다. 

- "아이들이 뽑은 거예요. 제 맘대로 못 해요, 어머니."그래서 나는 진짜로 반장이 됐다. - 그때 그 시절(글쓴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와 연관된 사람 모두가 처음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만 장애인이 처음인 건 아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적어도 그때 나는 살았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초등학생 최의택으로서 살았다. <내가 사랑한 시절> 중에서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반강제로 자각당한 그는 장애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하도 그러니 '장애인인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전에 장애인 다큐멘터리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던 그였지만 이내 장애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뭔지 모를 해방감과 개운함을 느낀다. "그래, 나 장애인이다." 하지만 타인이 일방적으로 따옴표 안에 넣어 분류하고 정의한 규정까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장애인'이길 거부한다." 그의 자아 탐색과 장애 수용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에, 말하자면 그는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 가깝다. 



여기서 최의택도 언급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 떠올랐다. 장애인은 어떻게 장애라는 정체성을 '수용'하게 되는가? 장애는 경험이며, 장애인은 사는 동안 그 경험에 맞서는 동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애를 바라보고, 그것을 삶과 연결하고,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개개인이 써내려간 '서사'의 결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는 지금 이 책을 통해 누군가가 자아를 인식하는 것을,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을, 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취향에 관해서라면 하루 종일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정작 '나'에 대해서는 몰랐던 사람. 소설 속 청소년 주인공들처럼 최의택 작가도 진보와 퇴보를 되풀이하며 성장 중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퇴하고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밝히면서도, 이제는 숨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직도 나의 장애로부터는 눈을 돌리고 싶다고, 똑바로 응시해 현실을 알게 되면 그 무게에 내가 짓눌리는 건 아닐까 싶다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글쓰기가 마치 사회운동이나 투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는 계속 쓰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당사자인 본인이 쓴다 해도, 장애를 다루는 소설이 결국 장애를 대상화시켜 더더욱 밖으로 밀어내는 건 아닌지 고민 중이지만 그는 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장애와는 전혀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글이 배제와 소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나'는 '내'가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며 진작부터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장애 수용의 일환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 더하여 스스로 쓰는 평론이기도 하고 동시에 투쟁 일지인 것도 맞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여러 가지 것들과 맞서 싸우고 분투하고 이름붙여 호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사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우리는 그가 한 인간으로서도, 여기 사람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소수자로서도, 단어를 잣고 글을 짜는 작가로서도 확장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그는 아직 길 위에 있으며, ‘disabled person'과 'person with difficulty’ 사이에서 과도기 청소년처럼 여전히 갈등 중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언어로 말할지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이 탐험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고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에서 <절망을 즐기지 않기 위하여> 



글쓴이는 자신이 쓰는 글에 담긴 가벼운 에너지를 강조하고 읽는 이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미리보기에 <아임 소 소리 존>' 장(章) 전문이 공개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부분도 바로 거기였다. 그러나 책에는 <내가 진짜 장애인이 되던 날>과 <실격하는 삶>도 있다. 읽고 있노라면 치밀하고 단단한 슬픔, 새어나가지 않고 머무르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휠체어를 타고 극장에 가는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지난한지, 시상식이나 행사에 참석하려면 어느 정도의 각오와 준비가 필요한지, 어떤 장애 보장구가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는지, 나이들어가는 부모님을 둔 그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정현종, <방문객>)'이 글에 새겨져 있다. 



왜 어떤 사람의 인생은 스스로 내리치는 철퇴로 산산조각내는 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을까. 스스로에게 철퇴를 가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꼭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회의 틀 바깥으로 떠밀리다 못해 끝내 스스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 약해서, 이상해서, 소수라서 그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길에서 벗어나고 만다. 그들에겐 그러한 불합리를 바로잡을 힘은커녕 그에 대해 이야기할 목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 길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모두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소리쳐 알려야 한다. 누가? 길에서 밀려난 이들이. 

그의 말에 따르면, 주변 사람들이 '네가 얘길 해야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그게 정말 싫었다고. 그런 얘길 인터뷰로 전했던 게 올해 여름이었는데, 가을에 그는 소리쳐 알리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쓰는 것으로 이미 말하고 있었다. 인간 최의택은 아직 자기 언어를 찾아 헤매는 중이지만 자음과 모음을 굴리고 다듬는 작가 최의택은 ≪비인간≫에서 일찌감치 '말'을 결정하고 소리내어 불렀다. 퀴어, 병신, 불구자 같은 멸칭(蔑稱)은 그의 소설에서 금기어도 비속어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번역기를 돌릴 필요가 없다. 듣고 읽을 마음만 있다면,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말과 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최의택의 말이 내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느끼는 감각은 이상한 걸까?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경험을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인어공주 하나만일 리는 없지 않은가. ㅇㅇ이어서 혹은 ㅇㅇ이 아니어서, 한 마디로 '주류이자 다수'가 아니기에 나의 말이 아닌 타자의 말로 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하는 무력한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다. 아니, 많았다. 맞은편에 있는 상대가 내 말을 외계인과의 교신보다 더 이질적으로 받아들일 거란 걸 일찌감치 알아서 나는 나답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공감이나 이해 따위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듣기만이라도 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그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 말고 다른 건 될 수 없는 사람들끼리 가까이 앉아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작가인 최의택은 쓰고, 독자인 나는 읽는다. 인간 최의택이 말하고 싶어한다. 그럼 그 전언을 받은 사람이 돌려보낼 답은 하나밖에 없다. 들을게요. 그리고 같이 이야기해요.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인지, 나의 언어로 세상을 조립하는 일에 대해서.  

질환 이야기를 할 필요는 계속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질병이나 장애와 함께 더 오래 살아가게 됨에 따라, 의료는 그러한 삶에서의 의료 외적인 요구들을 점점 더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 사람들은 그들의 삶의 특수함에 형식과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야기는 언제나 상처에서부터 시작해왔고 치유의 한 형태였다. 

아서 프랭크, ≪몸의 증언≫ 




몇 년 전에 읽었던 질답을 옮기며 끝맺겠다. 

Q. 개인의 언어를 존중하기 위해 장애인을 만나면 물어봐야 할까요? 사람 중심 표현과 정체정 중심 표현 중에서 뭘 선호하는지 말이에요. 

A. 언제든지 물을 수 있죠. 그게 필요하다면요.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지 않나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뭘 해야 하는지요.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물어주세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최의택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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