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통영』을 읽다 보면 달아난다는 것의 정체를 여실히 알게 된다. 그렇지. 달아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고향인 통영으로부터 달아나고 또 달아났던 반수연 작가. ‘토영’에서 ‘천하의 반수연’이었다던 그는 왜 그토록 달아나지 않고는 안 되었을까.
택아, 주먹 좀 펴고 자라. 자면서도 그리 주먹을 쥐고 자노. 누군가가 손을 만지작거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어머니인지 누나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153쪽
‘택’은 캐나다에서 테이블 톱에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상실은 그로 하여금 주먹을 쥐고 자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다. 저 주먹. 자면서도 풀지 못하는 저 주먹이 손가락 때문만은 아님을. 떠나는 것이 중요했지 도착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작가에게 이국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섣불리 주먹을 펴지 못하고 살아냈을 삶. 그것이 아무리 원하던 삶이었다 해도. 더군다나 해방은 그리움과 함께 포장되어 일괄 구매할 수밖에 없는 패키지 상품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소설 일곱 편 중 어느 하나도 울음을 삼키지 않고는 써지지 않았으리라. 그때 삼킨 울음들, 이제 다 풀어놓으시라. 몸 구석구석 박혀 있을 눈물을 다 쏟아내시라. 통영으로부터 부단히 달아나, 달아난 곳에서는 한 순간도 잊지 못한 통영을 향해 머리를 둔 그의 삶과 문학에 나의 눈물도 보탠다. 이 헤어날 수 없는 뼈아픈 역설 앞에 고개를 숙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