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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님의 서재
  • 여행, 혹은 여행처럼
  • 정혜윤
  • 10,800원 (10%600)
  • 2011-07-27
  • : 1,500

어느 순간 생이란 결코 끝없이 마주해야하는 불안의 반복에 다름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모든 결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원인이 앞선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주 사소한 하나의 물건이라 해도 이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에는 물건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생산의 가치와 목적이 분명하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실체가 아닌 어떤 결과라 해도 그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에는 원인이라는 분명한 사건이 반드시 선행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것이 세계를 구성하는 논리지만 생물들의 생이란 것에서 만큼은 예외인 것같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생의 존재 전에 목적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순간의 쾌락으로 탄생한 쾌락 잔해물로의 인간일 뿐이다, 라고 밖에 여길 수 밖에 없지 않나? ‘나'라는 원인 없는 결과물.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세계를 지배하고 지탱하는 필연적 논리라고 믿지만 모순적이게도 정작 나라는 존재는 원인 없는 결과물이라는 비논리적 상태. 슬프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서점에서 정혜윤 피디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의 서문을 훑어보고는 이 책이 정혜윤 피디가 유럽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남긴 기행문의 일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보기 위해 파리를 찾은 노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하는 서문을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녀의 방대한 독서 지식과 인용들이 여행지의 기억 속으로 섞여들 것이라 기대했다. 곧바로 책을 들고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이동하여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나는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했고, 어디라도 좋으니 제발 이 곳이 아닌 지구상의 아무 장소에라도 떨어뜨려 주길 바라는 심정의 상태였기에 얼마든지 책 속의 도시로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책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책의 첫번째 장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약간의 숨고르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그러니까 내가 기대했던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가본 최고의 여행지 혹은 잊을 수 없는 여행지, 추천 여행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물었다. “당신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지요? 어떤 방법과 생각으로 그 여행을 계속했지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혜윤 피디에게 여행이란 생이라는 가없는 질문들과 마주하며 알 수 없는 생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선택해야만 하는 당위적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여행에서 갖는 관심사는 여행지의 풍광들에 있지 않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제각각의 사연을 갖고 있는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세우며 이들의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여행의 흔적과 추억들이 새겨진 기행문이 아니라, 삶이라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의 동행에서 주고 받은 우정의 기록물이다. 우리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 너머 어디인가에도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그 곳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음을 여행을 통해 알아간다.

여기까지가 그의 이야기였다. 이 여행 이야기는 우리 눈엔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를 사로잡았다. 우린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다양성 속에 이미 살고 있음을, 나아가 그 다양성은 존재들이 저마다의 삶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적응하려 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나를 사로잡았다.

너는 모든 것을 인내하라! 그러나 단하나, 정의롭지 못한 것만은 참지 말아라, 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수많은 불의들과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던 버마에서 온 이주 노동자 소모뚜.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며, 시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더 멀리까지 도약을 꿈꾸는 송경동. 살아온 흔적들의 모양이 지도라고 믿으며 인간성의 지도, 내면의 지도를 만들어 가는 지도제작자 송규봉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그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여행자들 저마다가 지켜나가려는 여행자의 태도를 기억하려 한다.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 여행자 바로 그들이 여행에서 마주하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것이다.

불안과 회한의 삶 속에서 부디 신이 존재한다면 더 이상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올바른 선택의 길로 걸어 갈 수 있기 위해 부디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해주시길 집으로 향하는 더딘 발걸음 속에서 매일 밤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부질없는 기도를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혹시 두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번에는 내가 단호히 거절하리라. 대신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을 꼭 붙들고 사랑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지금 이순간 여행자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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