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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님의 서재
  •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상
  • 마쓰모토 세이초
  • 12,600원 (10%700)
  • 2009-03-27
  • : 2,168

나이테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적갈색 고목 책상, 팔걸이가 달려 팔꿈치를 걸춘 채 턱을 괴곤 하는 나무의자, 희뿌연 담배연기가 안개처럼 옅게 펼쳐져 알 수 없는 공기를 만들어내는 서재,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글자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노년의 거장의 얼굴. 내가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느낀 인상이다.

글쓰기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세이초는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종류의 작가가 아니다. 40세가 넘어 비로서 문단에 등장하게 된 이력에서 부터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다양한 글을 쉼없이 써낸 다작의 작가로의 면모까지. 세이초는 마치 관습적으로 끌어와 위치시키려는 규정과 한계를 거부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인 듯 세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쉼없이 펜을 굴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점과 선>, <모래 그릇>과 같은 ‘사회파 추리소설’로만 익히 알려져 온 작가였지만, 사실 세이초의 소설은 이미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곳까지 멀리 나아가 있었다. 그리고는 최근에 와서야 세이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이초 소설의 재조명이 활발히 이뤄지게 되면서, 세이초 소설의 진면모들이 이제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이라는 타이틀로 출판된 선집도 이러한 흐름 하에서 만들어진 기획물이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장녀로 불리는 일본의 추리소설가 미야베 미야키의 편집으로 만들어진 이 단편 선집은 마츠모토 세이초 소설의 더 멀리까지 나아가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세이초의 문학을 새롭게 접하는 이에게도 올바르고 훌륭한 길잡이 역할이 되어주는 탁월한 선집이다. 가끔 방대한 작품의 몰록을 소유한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될 때면, 어떤 작품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시작도 해보기 전에 혼란과 좌절을 맛 본 사람들은 분명 히 공감할 것이다. 작가의 문학 세계를 보다 간결하고 깊이있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집 혹은 전집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이런 기획이 쉽사리 이뤄지는 것은 아니여서인지 시중에서 이런 기획물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번 단편 컬렉션은 세이초 문학의 흐름과 미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선사하는 훌륭한 기획으로, 그동안 세이초 문학에 목말라 하던 이들에게 단비같은 컬렉션이며 세이초 문학의 세계를 들어가기 위한 탁월한 안내서이다.

마츠모토 세이초는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문학인생을 시작했다. 세이초가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뜨악 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분명 세이초는 '나오키 상'이 아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세이초의 두 번째 단편작이며 원래는 나오키 상에 후보로 출품된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은 심사위원에 의해 대중소설상인 나오키 상보다 순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에 적합다는 판단으로 아쿠타가와 상에 출품되어 제28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순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편협한 분류는 세이초의 작품세계 안에서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은 고쿠라에서 살던 시기의 오리 모가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다노우에 고사쿠의 이야기이다. 고사쿠는 어린시절부터 지닌 신체적인 핸디캡으로 방황의 시간을 보냈지만, 오리 모가이 소설의 자료조사를 진행하며 새로운 희망에 눈빛이 올타오르기 시작한다. 아들의 작은 희망을 응원하며 뒷바라지 한 후지와 생의 마지막까지 자료수집에 매달린 고사쿠의 노력은 결국 빛이 바랐고 마지막은 쓸쓸했지만, 결코 이들의 삶이 부질없다거나 의미없지 않았다. 짧은 순간을 위해 빛을 내뿜는 별똥별처럼 누구보다 밝고 찬란하며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작가로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며 써내려 간 이 단편은 세이초의 가슴에 품기로 마음먹은 결사표처럼 느껴지기에 그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미 몇 편의 추리소설로 세이초의 소설을 접했던 사람들이라면 순문학에 가까운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읽고는 세이초 소설의 깊이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가로만이 아니라 편집자로서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순 문학, 추리소설, 논픽션을 넘나드는 폭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들 사이에서도 세이초 작품의 정수들만 모아 구성되어 있는 이번 컬렉션은 어느 하나의 단편을 선택하여 읽는다고 해도 결코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특정 작품을 꼽아 추천평을 붙이는 것은 크게 의미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렇지만 <지방지를 구독하는 여자>가 계속 머리에서 맴도는 것은…) 주제별로 구성된 각 장의 서두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해설을 곁들이는데 이것 또한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 중 하나이다. 사전에 줄거리를 미리 듣게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설을 나중에 읽는 편을 택하라고 권할테지만, 사려깊은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스포일러의 지뢰밭을 성큼성큼 잘도 피해다니기 때문에 미리 읽고 소설로 들어가다 해도 김이 빠지거나 할 일은 없을테니 마음 놓고 읽어도 좋다. 마치 마츠모토 세이초 팬클럽에 가입한 소녀처럼 열렬한 애정을 담아 독자들에게 전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개글은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미야베 미유키를 따라 자연스럽게 장난섞인 개인적인 감상평도 옆자리에 쓸쩍 끼워놓게 된다.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은 두툼한 두께의 책이 상, 중, 하로 나뉜 무려 3권으로 출판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출판물은 세이초 작품목록 중 아주 적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사실. 여전히 그의 많은 작품집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이초 소설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아직 번역되지 못한 세이초 소설의 번역과 출판이란 긴 여정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이들의 지속적인 응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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