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믿고 보는 작가 중의 한 명인 김려령의 신작 <트렁크>
이번 이야기는 성性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거침없고 솔직한 표현들이 저질스럽거나 거북하지 않고 술술 읽혔다.
마치 목넘김이 좋고 맛있는 맥주를 마셨을 때... 그 맛을 느끼는 순간 짜릿함과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처럼...
또한 곳곳에 재밌는 말이 많아서 이야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막아주고 있고,
끝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남자와 관련된 반전!!!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지고 혹시 2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던 책. <트렁크>
<<이제는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됐구나.
고액의 연회비와 혼인성사 자금을 지불하는 NM 회원들에게,
이런 아내는 어떠신가요? 하고 내미는 기호품이 된 기분이었다.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그렇게 잡았다.>>
주인공 노인지. 스물아홉 살, 여자.
업계에서 손꼽히는 결혼정보 회사 W&L에 근무 중이다. 입사 6년차...
그녀는 이곳에서도 VIP 전담부서 NM 소속이고 직급은 차창이다.
NM 이란... W&L의 비밀 자회사로, 이곳에 소속된 직원들은 VIP 회원의 기간제 배우자로 근무하고 있다.
계약 결혼, 또는 위장 부부....
VIP들이 비싼 비용을 내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직원들이 동의하면 두 사람은 일정 기간 같이 사는 것이다.
법적 결혼은 싫다며 스스로 비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우자 역할이라.. 모든 것이 비밀리에 진행되고
W&L의 다른 직원들조차 NM에서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녀에게는 몇 개의 결혼반지가 남았고 이제 곧 서른이 된다.
계약 결혼.. 일정 기간 서로 부부로 지내고 그 후엔 깔끔하게 안녕하며 다른 배우자를 찾거나
아니면 같은 사람과 재계약을 하거나...
누군가는 사랑 없이 이런 삶이 가능하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세상은 넓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모르게..
돈이 많은 사람들.. 사랑보다는 돈을 우선시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계약 결혼이나 부부로 위장하는 일 등등.. 이런 일들이 불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도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결혼식은 하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깐..
또한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어느 방송인의 말처럼..
젊은 사람들은 점점 결혼은 해도 이혼할 때 질척거림은 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거나.. 살면서 선을 긋는 경우도 많아지는 것 같고...
책 속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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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35
"그만한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왜 이런 결혼을 하는 걸까요?"
"법적 결혼을 하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거든.
상대한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순탄하게 끝낼 수가 없어.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 싫은데 더 큰 이유가 있나.
통통한 발이 곰발로 보이기 시작하면 사는 게 괴롭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은 거야. 그런 면에서 합리적이긴 한데 끈끈한 정은 없지."
이 부분을 보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깊은 관계는 NO, 부담 없이 원하는 것만 주고받는 사이는 YES.
즉, 책임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고 인간관계가 그렇게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VIP 회원들.. 갑의 입장인 그들은 돈과 명예, 능력까지.. 다 갖췄는데..
굳이 피곤하게 결혼 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비밀리에.. 가볍게 만나 일상을 함께 하며 즐기는 편이 더 편하겠지..
또 비싼 금액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사람을 골라 만날 수도 있고..
언제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
하지만.. 주인공 인지의 생각을 읽을 때면.. 저런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피곤할지..
사람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깊은 회의감만 쌓일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붕 떠있는 느낌이 들고.. 그녀가 좀처럼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다.
과연 그녀는 자신을 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혼... 또 성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보기 좋게 포장하지 않은 채..
이런 속사정도 있지... 인간의 속물적인 욕망을 민낯 그대로 덤덤하게 드러내는 글 속에서..
때로는 통쾌함과 시원함을, 때로는 부끄러움을, 때로는 깊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혼 이후에는 모든 삶이 관여당해. 심지어 국가가 헤어지는 것까지 관여하잖아. 둘이 합의했는데 왜 법원을 가야하지? 혼인신고처럼 파혼신고 하면 안되나? 그러면 앞다퉈 이혼할 줄 아나봐. 나라가 나서서 이혼하라 해도 하지 않을 사람들은 절대로 안해. 이혼 대책으로 같이 살 배우자를 마련해주는 것도 아니면서.
- p. 58 -
아주 어렸을 때는 어른만 되면 세상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세상을 알아버리는 것이었다.
저 바깥세상이 언제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한 적 있었나.
소주가 목을 할퀴면서 넘어간다.
- p.69 -
내 짐이 무거워 남의 짐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너도 나만큼 무겁구나, 공감하고 바라봐줄 뿐이다
- p.77 -
나는 이들이 선택한 NM 결혼에 왈가왈부할 생각 없다.
결혼제도가 긴 세월 검증된 삶의 형태라 하더라도 이들은 그것이 불편하다.
대안이든 쾌락이든 이 결혼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역으로 관습과 제도에 익숙한 것을 진부한 삶으로
조롱하는 듯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익숙함이 곧 진부는 아니며, 제도로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 p.1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