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인간관계를 이야기할 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는 뜻으로, 억지로 붙잡거나 끊어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또 가까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친구와의 관계가 참 소중했다. 피를 나눈 형제나 가족도 아니고 그저 같은 반, 혹은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며 어울렸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와 나 사이의 결속이 단단하게 맺어져 작은 것에도 함께 울고 웃으며 지금의 어른에 이르렀다.
하지만 함께 보낸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각자의 삶의 환경이 달라지고 바빠지면서 그 깊었던 우정도 빛바래고 흐릿한, 어떤 면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푹 빠졌었지’ 싶을 만큼 덤덤한 감정이 되어버린다. 만날 때면 함께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고, 예전처럼 농담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매일 같이 부대끼며 온 마음을 함께하고 공감했던 순간들이 모든 것을 다 쏟아낸 빈 그릇처럼 텅 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이렇게 인연이 다 한 관계인가 싶어 가끔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다가 불쑥 떠오르는 친구의 생일날, 혹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뜨거워지는 마음을 마주할 때면 우리의 관계가, 인연이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데라치 하루나의 소설 《기억은 물방울 모양》의 네 친구 역시 그런 애매한 거리를 두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보석 리폼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중학생 시절 동급생 친구 다카미네와 나가세. 시즈쿠와 모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관계는 처음 만난 중학생 시절부터, 40대가 된 지금까지 적당히 미지근한 상태였다. 졸업 작품을 만들기 위해 우연히 같은 조가 되었고, 우정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거나 몰려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네 사람은 마치 서로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결속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각자의 시간, 테두리 안에 나머지 세 사람을 채워 두었다. 그중 부유한 가정이었던 다카미네가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나가세에게 자신이 만든 보석 리폼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것을 권유한다. 진작부터 공방에서 보석을 다루는 일을 했던 시즈쿠, 같은 건물의 인쇄소에서 근무한 모리까지. 성인이 된 이들은 학생 때처럼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시간을 보낸다.
학생 때처럼 매일같이 몰려다니고 모든 것을 함께할 수는 없는 현실 속에서 각자 꿈꾸는 ‘영원’에 닿고자 하는 이들의 뜨거웠던 마음도 나이를 먹을수록 각자의 삶에 흐릿해지게 된다.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어느 순간 잊고 있던 영원의 마음을 되새기게 된 네 사람. 처음 다카미네가 나가세에게 함께 사업을 하자 제안할 때 즐거운 마음으로 그렸던 보석 스케치, 그리고 작업을 하며 만났던 오래된 보석들과 그에 얽힌 사연을 가지고 있던 손님들을 떠올리면서 멀게만 느껴지던 영원이 사실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카미네의 먼 친척이자, 늘 친구들 사이에서 말없이 묵묵한 존재이자 보살펴야 할 존재처럼 보이던 시즈쿠 역시 자신만의 길을 찾아 친구들이 있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한걸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행복한 결혼생활,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며 사는 무던한 모리는 아내에게 줄 보석을 의뢰하며 무탈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빠듯한 살림살이, 직장 생활을 하며 겪었던 상사와의 마찰과 트라우마로 인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각자 서툴지만 우직하게 살아온 네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다양한 인생의 선택지, 그리고 계획이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 속에서 어떤 전환점을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실패한 결혼생활, 누군가에게는 실패할까 봐 두려워 미루던 나만의 선택, 또 한 사람은 용기 있는 혼자만의 도전 등 30년의 시간을 흘러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새로운 빛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특별한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들의 사연은 2025년 회사의 폐업 시점으로 시작해 그들이 막 함께 일하던 20대의 시기, 처음 만났던 중학생 시절, 그리고 한창 헤매던 인생의 과도기 등 다양한 시점을 오가며 펼쳐진다. 서투르게만 보이던 어린 학생들이 자라, 서로에게 때로는 진심을 터놓기도 하고 위로를 하기도 하며 잔잔한 물방울 같은 인생의 조각을 함께 만들어낸다.
그 물방울들이 쌓이고 쌓여 책을 다 덮을 때에는 그 물방울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며, 때로는 비가 되어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돌고 도는 이야기가 이들이 쫓던 ‘영원’이 사실은 그들 가까이에서, 이미 영원과 닿은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회사 대표인 다카미네 덕분에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나가세이지만,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회사를 지금까지 이끌어 올 수 있었다. 또한 늘 보호해 주고 챙겨줘야만 할 것 같았던 시즈쿠는 엄마에게 받았던 부적 같은 목걸이를 나가세에게 건네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힘을 준다. 처음 만들었던 형태가 아닌, 나가세가 새롭게 디자인해 새로운 쓸모와 가치를 찾아준 보석들처럼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가며 서로에게 건넨 마음은 변화의 물꼬가 되어 주었다.
그 변화와 서로와의 연대, 따뜻한 연결은 무구한 반짝임을 이어가는 보석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삶 역시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면 꿈꾸는 영원에 가닿을 수 있다는 책의 메시지가 조금은 힘들고 때로 퍽퍽하게 느껴지는 현실도 긍정하고 희망차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일깨워 주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이미 지나간 인연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사람에서 사람, 시간을 거쳐 세월 속에서 돌고 도는 마음이 책 속의 네 사람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도, 내 인생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함께 하고 있지만 다른 길과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등장인물들에게 다정한 ‘재회’를 안겨준 것처럼, 혹시 소원한 관계가 된 옛 친구나 인연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오랜만에 연락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처음 살아가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서툴 수밖에 없다. 그 서투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찾아나가는 법을 일깨워 주는 독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