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고택에 들렀다가, 추사의 무덤을 보면서,급 추사에 대해 궁금함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세한도를 여전히 어려워하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성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를. 덕분(?)에 조선 천재 3부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추사'를 읽고 '다산'을 읽고나서 '초의'와 만났다. 앞서 읽는 이야기에서도 초의이름은 등장한다. 추사와 다산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 있는 이름이지만, '초의' 라는 이름은 낯설다.
<벽봉의 말을 듣고 난 완호는 초의의 두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뒤에 서너 차례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말했다.
"이놈은 너무 재기가 발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생길지도 모르는 오만을 누그러뜨리고 제어할 힘을 이름에 실어주어야겠소.훗날 '초의草衣'란 호를 주고 싶습니다"
(....)
벽봉이 찬탄하고 초의에게 말했다.
"초의가 무슨 뜻인지 너는 잘 알 것이다. 자기한테 남다를 제주가 있다고 건방지게 까불지 말고 항상 풀옷을 입은 사람같이 소박하고 늘 인욕과 하심으로 세상을 살라는 뜻이다">158~159쪽
초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오히려 재미나게 잘 읽혀졌다. 마치, 초의를 통해 작가님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삶과 죽음에 대해, 오만함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것은 무엇인지...코로나를 지나온 경험은, 조선시대 역병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삶과 죽음이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 갑과을의 관계로 이어지는 수많은 뉴스를 접하면서 산란했던 마음도 정리받았다. 고통받아 보지 않은자는 결코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겠구나... 그러니 자신들이 저지른 몹쓸짓에 대해 그것이 몹쓸짓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중은 탱화 그려 장엄하고 범패하고 바라춤 추고 향기로운 차를 내어 부처님과 중생들을 즐겁게 하는 실질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참선을 핑계로 벙어리 중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신도들의 시주만 얻으려 하고 절밥만 축내는 중이 되어서는 안된다.(...) 일천 강을 비추는 달 같은 중이 되어야 한다"/252
<초의>1권에서는 구체적인 활약상이 그려지진 않았다. 오히려 제3자의 눈으로 본 초의에 대한 모습이 그려진 느낌이다. 그래서 더 잘 읽혀졌던 것 같다. 삶과 죽음, 고요와 시끄러움,타인의 고통에 대한 생각들.... 그러나 요즘 종교에 대한 혐오가 도를 넘은 시점이라 그랬을까... 참종교인의 덕목에서 나는 왈칵 눈물이 났다. 참 종교인이라면 정치보다 가난한 이들에게로 눈을 돌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초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기 보다,초의를 통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그래서 뭔가 위로 받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