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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애, 타오르다
- 우사미 린
- 12,600원 (10%↓
700) - 2021-08-05
: 1,325
◇ 원본
https://m.blog.naver.com/03x24/222461219994
◇ 시작하는 문장
최애가 불타버렸다. 팬을 때렸다고 한다.
◇ 밑줄
나는 아는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콘서트 같은 현장도 뛰지만, 굳이 말하자면 있는 듯 없는 듯한 팬으로 남고 싶다. 박수를 보내는 일부가 되고, 환성을 지르는 일부가 되고, 익명의 댓글을 남겨서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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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무겁다. 물을 차올리는 다리도, 달마다 막이 벗겨져 떨어지는 자궁도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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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을 해내려고 힘을 짜내도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소한에 도달하기 전에 의지와 육체의 연결이 끊어진다. (···) 육체의 무게에 붙은 이름은 나를 잠깐은 편하게 해줬지만 그에 더해 그 이름에 의지하고 매달리게도 했다. 최애를 응원할 때만 이 무게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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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네버랜드에 가자. 코끝이 찡했다. 나를 위한 말 같았다. 공명한 목에서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년의 발그스름한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목에서도 같은 말을 끄집어내려고 했다. 말 대신 눈물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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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가 보는 세계를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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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존재 자체를 좋아하면 얼굴, 춤, 노래, 말투, 성격, 몸놀림, 최애와 연관된 모든 것이 좋아진다. ‘중이 미우면 승복도 밉다’라는 말의 반대다. 중을 좋아하면 중이 입은 승복의 터진 실밥까지 사랑스럽다.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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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자욱했다. 어두운 구름은 해변 가까이 서 있는 집들을 감추었다. 최애의 세계에 닿으면 보이는 세상도 달라진다.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 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러면 귀에서 흐르는 최애의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기분이 든다. 내 목소리에 최애의 목소리가 겹치고, 내 눈에 최애의 눈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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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지구는 둥글고 일은 끝이 없고 최애는 고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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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친구나 연인이나 지인이나 가족 같은 관계가 가득하고, 서로 작용하며 매일 미세하게 움직인다. 항상 상호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균형이 무너진 일방적인 관계를 건강하지 않다고 한다. 희망도 없는데 계속 매달려봤자 무의미하다느니, 그런 친구를 뭐하러 계속 돌보냐느니 한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데 멋대로 불쌍하다고 하니까 지겹다. 나는 최애의 존재를 사랑하는 것 자체로 행복하고, 이것만으로 행복이 성립하니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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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배려하는 관계를 최애와 맺고 싶지 않다. (···)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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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실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종소리도, 종소리를 시작으로 갑자기 떠들썩해지는 복도도, 밖에서 잎이 스치는 소리도 하얗고 차가운 침대에 누우면 멀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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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 집 소파였다면, 내 체온과 냄새가 스며든 담요 속이라면 달라진다.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 자더라도 해가 저물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마음 어딘가에 새까만 초조함이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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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수많은 것들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은퇴한 최애의 현재를 앞으로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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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평범하게 생활하지 못할까.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생활이 왜 마음대로 안 될까. 처음부터 망가뜨리려고, 어지럽히려고 한 게 아니다. 살아 있었더니 노폐물처럼 고였다. 살아 있었더니 내 집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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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내가 엉망진창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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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봉을 주웠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뼈를 줍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내가 바닥에 어지른 면봉을 주웠다.
(···)
기어 다니면서, 이게 내가 사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족보행은 맞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몸이 무겁다. 면봉을 주웠다.
◇ 감상
19세 등단과 동시에 각종 문학상 수상,
21세 두 번째 소설로 아쿠타가와상 수상
천재 작가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는
애착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우리를 살아있게 할
그 감정의 세밀한 묘사로
지금 MZ세대를 이해할
단 한 권의 소설이 되었다
*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아’
나를 살게 하던 초록은
결국 네버랜드를 떠났다
웬디가 되려고 한 적은 없었으나
영영 팅커벨이고 싶진 않았지
날개를 떼어낸 자리에
척추를 고루 심는다
인생을 최애와 함께 태우면
여생만이 남을 텐데
결국 심지마저 사라졌구나
내일은 걸을 수 있을까
통증으로 짙어질 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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