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받는 투명인간 A.B.C[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모멸받는 투명인간 A.B.C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
전혜원, 서해문집, 2021-11-11
비정규직이 역대 최대라는 기사가 뜬다. 어제, 산재사고 사망률이 감소했다는 성과를 대대적으로 치하하는 모습 뒤로 2024년 23명이 사망한 아리셀 공장 대표들의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절규하는 유족들 모습이 겹친다. 대표들의 어마어마한 감형 기간 대비 유족들이 흘리고 흘릴 눈물의 시간이 뭐라고, 그렇게 또 지나갈 일이다. 반복된 산재사고는 늘, 형태가 같다. 그리고 어김없이 결과도 같다.
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산재 사망자가 없는 것이 당연히 바람직하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통계란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여지나 감춰지는 부분이 있다. 제조업 산재 사망자 수는 증가했다거나, 기사에서 지적하듯 노동자의 감소, 특히 “건설 경기 불황으로 현장이 줄어든 영향”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 정부는 반박하며 “예방·감독과 현장의 안전 노력”이 이룬 결과라고 한다. 산재사고 발생 현장이 ‘제조업’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늘 같은 패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통계표를 보며 마냥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 ‘비숙련 노동자’의 증가는 ‘아리셀 공장 참사’에서도 드러난다. 생산 목표와 납품 일정을 위해 비숙련 노동자,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제품을 생산했다. 배터리를 다루는 위험한 생산환경에서 불량품 발생과 잇단 발열과 폭발이 이뤄졌음에도 공정을 계속했고, 공장은 비상상황에 대피하기 어려운 구조였으며 노동자들 대상으로 제품생산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안전관리’에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양형 사유는 유족과 합의란다. 놀라운 점은 “피해 회복 노력을 형량에 반영하지 않으면 피고인들이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줄이거나 포기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감형 사유다. 이건 늘 그래왔듯이 “돈이 장땡”이란 사고의 확정 아닌가. “유족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위로, 사과 한마디 없이 돈 몇푼 쥐어주며 처벌불원서를 받으려 하고 있는 회사 측을 용서할 수 없다(동아일보, 2025.1.9)”, "국가에 버려진 느낌(한겨레, 2026.10.20)는 유족이 말이 눈에 밟힌다. 이 또한 얼마나 반복되어 본 모습인가.
왜 한국에선 ‘노동’과 ‘노동자’는 멸시받아 왔고 더불어 ‘불온’의 대상이 되었는가. 5월 1일 조차도 ‘노동자’라는 말 사용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한사코 ‘근로자’를 고집하던 한국 사회. 더구나 더 들아가서 ‘노동자’를 더 세세하게 분류하며 차별을 더 공고히 한다.
노동자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렵다. 필연적으로 모두 노동자일 수밖에 없기에 ‘나’의 가치를 부각하기 위해 그토록 세세하게 구분하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에 매겨진 가치,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시장’이라 말하겠지만 그 ‘시장’에서 형성된 가치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농업사회를 거쳐왔음에도 너무도 오래 ‘육체적’ 노동을 천박하게 여겨 온, 세뇌된 인식이 그 기본틀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특정 집단들이 계속 이 틀이 유지되도록 힘쓰고 있다.
저자는 이런 오래되고 고착화된 노동에 대한 인식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기자로서 노동현장의 취재를 바탕으로 현재 일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문제에 주목한다. 저자의 논점은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에서 주장하는 바와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논쟁적으로 접근한다. 2021년 출간된 책이니만큼 취재한 노동현장은 2020년 이전이다. 그때와 지금, 여전히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다를까. 다만, 오래 묵은 기본적인 관념틀을 배제하고서 ‘노동’에 대해 말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떠올린 건 “산재”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부분이 산재사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재를 다루며 소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일터에서 죽지 않을 권리-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노동현장 사고가 발생 기사를 보면 놀랍지 않다. 노동현장의 A씨, B씨, C씨……끝없는 A, B, C. 사고 발생 날짜와 사업장소만 다를 뿐 사고가 발생한 상황, 원인은 복사한 듯 똑같고 사고가 발생한 후 머리를 조아리며 울어대는(울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사업주의 모습, 시간이 지나면 특정 업체의 사고 소식은 다른 업체의 사고 소식을 덮이고 그렇게 어디가 어디였나 가물한 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희미해진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업주들은 대형 로펌을 수임하고 최소한의 법적 처벌을 받고, 죄가 사해진 양 환하게 웃는다. 사고가 나서 울고 사고처리 과정에서 울고 법적인 판결 후에도 우는 건 오로지 노동자, 미치게도 똑같은 데자뷰.
2016년 지진 당시 KTX 김천구미역에서 사람이 두 명 죽었다. 선로 보수유지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달려오는 열차에 치인 것이다. 그날 지진으로 열차가 두 시간 정도 연착된다는 사실은 《연합뉴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서도 수차례 예고했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가 정작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2021년 출간된 이 책의 기사 속 KTX사고, 그후로도 몇 년이 지났건만 난 지역만 달리한 이러한 기사를 더 본 기억이 있다.
*청도 무궁화호 열차에 선로 작업자 7명 치여…하청근로자 2명 사망 <2025.8.19. 연합뉴스>
*아산 KTX 선로 공사장서 30대 작업자 컨베이어 벨트 끼여 숨져 <2026. 7. 1. 뉴스1>
*경부선 의왕역서 작업자 열차 사고…50대 코레일 직원 심정지 <2026.08.29. 기호일보>
특히, 경북 청도에서 발생한 사고는 사고내용이나 원인이 같다. SPC 빵 공장과 쿠팡의 사망사고는 얼마나 또 반복적이었던가. 그래서 사고 후에 달라졌는가. 열악한 근무환경의 변화보다는 그저 사람이 대체될 뿐.
저자는 2016년 사고 전까지 “외주화는 선험적으로 나쁜 것이며, 산재는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로만 여겼”다가 이 사건을 계기로 관점을 전환한다. “긴박하고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산된 고용구조가 어떻게 ‘조율 실패’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외주화가 왜 위험한지”. 물론 노동의 영역도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행위자들이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면서 벌이는 일련의 상호작용’임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난, 그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이 균등하지 않고 불균형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랜 관념에 따른 ‘노동천시’, 기업가와 법률가란 행위자들의 힘을 우선하는 이 사회의 세계에서 ‘노동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제외하고 논의할 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비교적 ‘노동’에 대한 가치가 우리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여겨지는 유럽의 경우, 이러한 산재사고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다.
기업이 책임을 면하려면 사고 당시의 일반적인 기술 수준이나 경제 상황, 동종업계 관행에 비춰봤을 때 충분히 합리적인 조치를 했다고 기업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반면 한국은 안전규정을 기업이 고용한 ‘노동자(주로 중간 이하 관리직)’가 지켜야 할 규정으로 이해한다. 사고가 나면 그 회사의 안전보건 시스템에 책임을 묻기보다 노동자 개인의 규정 위반을 처벌한다.‘
그러고 보니 화성에서 23명의 사망 사고가 하나 더 떠오른다. 1999년 역시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씨랜드청소년 수련원 사고 말이다. 이 사고에서도 23명이 사망했고 대부분 어린이였다. 이 사고 대표자는 징역 1년형(금고 4년)을 받았고 씨랜드 사고가 난 그 장소 부근에서 대형 까페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1999년에도 처벌을 강화해야 하니, 처벌이 약하니 어쩌니 말은 많았는데 이렇다. 1999년 이후로 얼마나 흘렀나. 대한민국은 선진국,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문화강국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얼마나 변화했나.
누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면, 그 죽음이 실은 무겁지 않다는 뜻이다. 그 죽음들에 부아가 치미는 인간의 수가 적다는 의미다. 그게 조직이든 사회든. 그럼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안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사고가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 사고는 일어나기보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많고, 사고가 나면 그건 운이 없고 재수없는 일일 뿐이고, 사고예방을 위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 사고가 난 뒤의 벌금이 더 수익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끝없이 나오는 ’사람‘을 돈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행위자들, 그의 동조자들이 ’법‘을 통해 만들어내는 형태다. 이 책의 소갯말이, “소멸하는 일자리와 모멸받는 사람들에 관한 한국 노동”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줄, 이전보다는 나은 상황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하루하루 모멸감만 쌓여간다. 소멸하는 일자리보다 먼저, 내가 소멸해 버릴 것 같다.
*연합뉴스, 2026.10.20.(https://v.daum.net/v/20261020100237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