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와 신민회, 대성학교, 쳥년학우회

 

 

 

안창호는 1907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연에 참여해 연설을 했는데,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 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 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강연에 감화를 받은 조만식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1907년 2월에 안창호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습니다.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 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스물아홉 살의 안창호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조건에 합당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각 도에서 골고루 인물을 구하는 것인데 이는 여러 가지로 불쾌한 악습이 된 지방색을 예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동지들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습니다. 안창호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 대부분이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습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 이갑, 평양지방의 부자들 이종호, 이승훈, 그리고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등이었습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습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습니다.

이광수에 의하면, “신민회는 비밀결사로서 각 도에 한 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는 군 책임자가 있어 종으로 연락하고, 횡으로는 서로 동지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엇다.” 그리고 “입회 절차는 심히 엄중하여서 ‘믿을 사람’, ’애국 헌신할 결의 있는 사람‘, ’단결의 신의에 복종할 사람‘ 등의 자격으로 인물을 골라서 입회를 시키는 것이요, 지원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광수는 “신민회가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일본 경찰이 이것을 탐색하게 된 것은 합병 후였던 것으로 보아서, 이 단결이 어떻게 비밀을 엄수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소위 테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700여 명의 혐의자가 경무총감부 아키라이시 모토지로의 명령으로 검거될 적에야 비로소 세상은 신민회라는 것과 누가 그 회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적었습니다.

안창호는 1907년에 평양의 김진후金鎭厚, 선천의 오치은吳致殷, 철산의 오희원吳熙源 등의 재정적 원조를 받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했는데, 교육방침은 정직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이었습니다.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습니다. 대성학교는 민족사학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아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1909년 2월 3일 융희황제가 서도순행 중 대한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함께 들고 나와 환영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선생은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대한제국 황제를 환영하는데 일장기를 들고나갈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 일제의 따가운 주목을 받았습니다.

안창호의 인격은 이광수의 다음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도산은 평양 대성학교의 무명한 직원으로서 교장을 대리하는 것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도산이 무엇에나 자신이 표면에 안 나서고 선두에 안 나서는 사업 방침에서 나온 것이어서 실제로는 도산이 대성학교의 교주요 교장이었다.

 

안창호는 건전한 인격을 역설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이 없고 속이는 행실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게 학생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하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반면에 안창호는 “학도들을 사랑하였고 모든 긴장을 풀고 유쾌하게 담소 오락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둘 것을 잊지 아니하였다. 이런 좌석에선 도산 자신도 노래하고 우스꽝스러운 흉내도 내어서 남을 웃겼다”고 이광수는 증언했습니다.

대성학교는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습니다. 안창호는 제1회 졸업도 보지 못한 채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그 짧은 기간에 젊은이들에게 미친 감화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이광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남강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운 것도 함북에 경성중학이 선 것도, 그 밖에 크고 작은 무수한 사립학교들이 서북 지방에 울흥蔚興한 데는 도산과 대성학교의 공이 대단히 컸던 것이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1864~1930)이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운 것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난 후였습니다. “나라가 없고서 일가와 일신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를 받을 때에 나 혼자만 영광을 누릴 수가 없소”라는 말을 듣고 이승훈은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론, 교육론을 직접 듣고 그날로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가서 자기 주택과 서재의 공사를 중지하고 그 재목과 기와를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2세 때 어머니를 여읜 이승훈은 열 살 때 이름난 유기상鍮器商 임권일상점林權逸商店의 사환으로 들어가 3년 뒤에는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습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선敬善과 결혼하고, 보부상으로 평안도 및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전전하면서 자본을 모아 납청정에 유기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했습니다. 1901년 평양에 진출,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손을 대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오산학교는 그의 열성과 성의를 바탕으로 이종성李鍾聲, 이광수李光洙, 조만식曺晩植 등의 노력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민족교육사상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습니다.

안창호는 1909년에 젊은이들을 결합하여 일대 수양 운동, 즉 민족향상 운동을 일으키려고 쳥년학우회를 발기했습니다. 그 정신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단체생활의 훈련을 힘쓰며, 한 가지 이상의 전문적인 학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고, 평생에 매일 덕德, 체體, 지智 삼육에 관한 행사를 하여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흥사단興士團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과 일치하는데, 약법에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덕체지德體智 삼육을 동맹수련同盟修鍊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를위해 흥사단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네 가지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인격, 단결, 공민의 3대 수련활동을 합니다.

쳥년학우회는 정치적 성질을 띤 것이 아니라고 하여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창호는 자기가 아무리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평양의 대성학교에 칩거하더라도 당국이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정치가요 혁명가로 지목했습니다. 안창호는 쳥년학우회 운동과 대성학교에 지장을 줄 것이 두려워 대중을 향한 연설도 서울로 가는 것도 피하고 있었습니다.

안창호는 민족향상 운동은 도덕 운동이지 정치 운동이 아니라고 절연히 구분했습니다. 그가 민족향상 운동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두 가지로 가를 수 있습니다. 이광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적이란 것은 민족향상 운동자가 정치적 야심을 가지게 되면 그 운동을 정치에 이용할 걱정이 있고, 또 도덕적 민족향상의 가치를 정치보다 아래로 떨어뜨릴 근심이 있다. 민족향상 운동은 정치보다도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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