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절 워버턴Nigel Warburton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 Philosophy the Classics』(도서출판 知와 사랑) 중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 순수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접근을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기술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며 그 역은 아니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칸트의 혁명적 사상은, 우리가 살고 있고 지각하는 세계는 단순히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지각자의 마음의 성질들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장밋빛 안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분홍색으로 보일 것이다. 칸트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는 대체로 세계에 관한 수동적인 정보 수용자라고 가정했다. 반대로 칸트는 세계의 지각자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경험에 일정한 형태를 부과한다고 논증했다. 우리가 세계를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적용시켜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지각 대상들의 공간적 관계에 따라 경험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원인과 결과 및 시간과 공간은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저 바깥 세계에 존재하기보다는 지각하는 주관에 의해 부여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착용하는 ‘안경’이 우리의 모든 경험을 채색한다는 말이다. 이 유비를 더 끌고가면, 만일 우리가 그 ‘안경’을 벗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순수이성비판』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우리가 이성만을 가지고 실재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칸트의 결론은 지식은 감각경험과 지각자의 개념들 양자를 모두 요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가 없는 어느 하나는 쓸모가 없다. 특히 현상의 세계 너머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이것이 경험에 근거하고 있지 않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순수이성은 초월적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접근할 열쇠를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주의 깊게 고안된 ‘건축학적 체계’ 또는 구조에도 불구하고 매우 복잡하며 읽기 어렵다. 그 어려움의 일부는 주제 자체의 어려움, 즉 칸트가 인간지식의 한계를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려움의 대부분은 그가 사용하는 전문용어와 그의 굴곡이 심한 문체의 직접적 결과이다. 그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특성은 부분들의 내적 연관성이다. 즉 이 저작의 온전한 이해는 그 모든 부분들에 대해, 그리고 이 부분들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에 대해 알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 저작의 주요 주제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개괄할 만큼의 지면이 허용될 뿐이다.
선천적 종합 the synthetic a priori
데이비드 흄 같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지식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관념들의 관계와 사실 문제가 그것이다. 관념들의 관계는 정의에 의해 참이 되는 지식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지식이 이에 속할 것이다. 우리는 캥거루에 관한 경험 없이도 이런 지식의 참을 확신할 수 있다. 이 지식은 단순히 ‘캥거루’에 대한 정의로부터 성립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물이 아닌 캥거루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검토하기에 앞서 이미 이들이 ‘캥거루’의 의미에 대해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진술을 ‘분석적’이라 불렀다.
흄이 구별한 다른 종류의 지식의 예는 ‘몇몇 총각은 동판화를 소장하고 있다’와 같은 것이다. 이 진술이 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길은 몇 가지 관찰을 행하는 것이다. 당신은 관찰과 독립해서 이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 진술은 세계를 이루는 어떤 부분에 대한 진술인 것이다. 흄에게는 이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었다. 즉 진술들은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이어야 한다. 만일 진술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인간의 지식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
흄의 저작을 읽음으로써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칸트는 지식의 세 번째 유형을 인정한다. 칸트의 이른바 선천적 종합으로서의 지식이 그것이다. ‘종합적’이란 ‘분석적’에 대비되어 사용된다. 만일 한 진술이 정의에 의해 참이 아니라면 그것은 종합적이다. ‘선천적a priori’은 경험과 독립해서 참임이 알려지는 모든 지식을 지칭하여 칸트가 사용하는 라틴어원의 말이다.* 이 말은 경험으로부터 얻어짐을 의미하는 ‘후천적a posteriori’이라는 말과 대조된다.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에게 선천적 종합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만일 한 진술이 선천적이라면 그 진술은 반드시 분석적이어야 한다고 흄은 확신했다. 칸트는 생각이 달랐다.
몇 가지 예들을 좀 더 살펴봄으로써 칸트가 의미한 바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 같다. 흄이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인정한 반면에 칸트는 세 가지를 인정했다. 선천적 분석, 후천적 종합 그리고 선천적 종합이 그것이다. 선천적 종합은 ‘모든 캥거루는 동물이다’와 같은 판단들을 포함한다. 즉 이 판단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주지 않는다. 동물이라는 개념은 칸트가 말하듯이 캥거루라는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후천적 종합은 ‘모든 철학자들은 안경을 끼고 있다’와 같은 경험적 판단들의 영역이다. 이 판단을 검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해서는 관찰이 필요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주요 관심사인 선천적 종합은 필연적으로 참인,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참임이 알려질 수 있는 판단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세계의 여러 면들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그런 판단이다. 이런 선천적 종합의 예는 대부분의 수학(예를 들어, 7+5=12와 같은 등식)과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진다’를 포함한다. 우리는 ‘모든 사건은 반드시 원인을 가진다’와 ‘7+5=12’는 둘 다 필연적으로 참임을 안다고 칸트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따라서 이 둘은 분석적이지 않다. 『순수이성비판』의 과제는 어떻게 그러한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일이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결국 우리 또는 그 어느 다른 의식 존재가 무엇이든 경험을 하려면 과연 무엇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하는가를 설명하는 일이 된다.
현상과 물 자체 appearances and the thing-in-itself
칸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현상들phenomena’의 세계)와 이것 뒤에 놓여 있는 실재를 구분한다. 이 실재는 ‘본체들noumena’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에 접근할 통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에 대한 지식에만 접근이 허용된다. 본체들은 우리에게 영원히 신비로 남아 있다. 따라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사변은 길을 잘못 들었다. 그런 사변은 본체계의 특징들을 기술하고자 하지만,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현상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세계에 대한 감각정보의 수동적 수용자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지각활동은 데이터를 수용하는 것 이상을 포함한다. 수용되는 어떤 것은 판별되고 조직될 필요가 있다. 칸트의 용어로 직관은 개념 아래에 놓인다. 개념 없는 경험은 무의미할 것이다. 즉 칸트가 말하듯이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나는 직관(감각 경험) 없이 내 앞에 있는 워드 프로세서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그 직관내용을 그 어떤 것으로 판별하고 또 재판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런 일은 그 직관내용을 개념 아래에 놓는 일을 포함한다. 직관을 다루는 마음의 능력이 감성이며, 개념을 다루는 능력은 오성(지적 능력: 옮긴이)이다. 지식이 가능한 것은 이렇듯 감성과 오성의 공동 작업에 의해서이다.
시간/공간 space/time
시간과 공간은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면 직관의 형식들이다. 이것들은 물 자체에서 발견되는 성질들이라기보다는, 우리 경험의 필연적 특성들이다. 시간과 공간은 지각자에 의해 부여된다. 달리 말하면 내가 창을 통해 아이들이 노는 것을 내다볼 때, 나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공간이 내가 부여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실재의 특성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논지에 따르면 그 사태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 나는 나의 지각들을 공간적으로 조직해야만 한다. 나는 공간을 떠난 지각을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간에 따라 사건들을 순서 짓는 일도 내가 직관들에 가하는 어떤 것이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대상의 내적 성질이라기보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