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의 네 점의 노예를 미완성으로 남겼다
작품을 Daum '광우의 문화읽기'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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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큰 덩이 머리 노예>, 1520-30년경, 대리석, 높이 2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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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큰 덩이 머리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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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젊은 노예>, 1520-30년경, 대리석, 높이 26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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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젊은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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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 1520-30년경, 대리석, 높이 27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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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를 제작한 후 네 점의 노예를 더 제작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이것들은 1520년에서 1530년 사이에 제작한 것들로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므로 ‘아카데미아 노예’라고 불립니다. 이 작품들에 붙여진 제목은 <큰 덩이 머리 노예>, <젊은 노예>,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 <수염 난 노예>입니다. 이 작품은 율리우스 무덤의 조각상 중 일부로 추측되는데, 1519년 로마의 레오나르도 셀라이오의 편지에 다르면 미켈란젤로가 그해 여름 무덤의 조각상 네 점을 조각할 것이라고 야코포 살비아티가 아기넨시스 추기경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반항하는 노예>를 제작할 때 돌의 결함과 충분하지 못한 부피로 인해 원하는 형상을 표현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미켈란젤로는 네 점의 노예를 더 제작하면서 이번에는 필요한 것보다 더 두터운 대리석을 주문했습니다. 부피가 부족해서 표현을 생략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재료를 넉넉하게 준비한 것입니다. <큰 덩이 머리 노예>의 경우 대리석이 그가 제작하려는 형상보다 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네 점의 노예를 공들여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를 제작한 후라서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나타낼 수 있었으므로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작은 것이 260cm이고, 큰 것이 278cm인 것으로 봐서 그가 실재 사람의 크기보다 훨씬 큰 조각으로 제작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미켈란젤로의 조각 제작방식이 변했다는 점입니다. 바사리와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늘 얼굴의 주요형태를 먼저 조각하고 나서 아래로 조금씩 조각해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미완성의 노예들은 튀어나온 부분부터 깎기 시작해서 특별히 감정을 실은 몸통의 근육 모양에 집중했으며, 얼굴은 한꺼번에 드러나게 조각했습니다. 그러나 1534년 피렌체를 떠나게 되면서 작업을 중단했고, 이후 다시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그의 피렌체 작업장에 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노예>를 보면 균형이 잡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 다리는 들려져 접힌 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있습니다. 몸무게의 중심을 왼쪽 다리로 잡아야 할 텐데 오른팔과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왼쪽 다리로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가 또 다른 요소로 무게를 지탱하게 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상태로는 새울 수 없는 조각입니다. 조각을 완성시켜 세우기보다는 릴리프처럼 현재의 상태로 남겨두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다른 부분들은 거친 상태로 남겨두었으면서도 몸통을 매끈하게 연마한 점입니다. 어쩌면 그는 다듬지 않은 부분과 다듬은 부분의 심한 대조를 일부러 남겨두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젊은 노예>와 <수염 난 노예>는 네 점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지만, 르네상스 취향으로 말하면 여전히 미완성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미완성이 주는 표현의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덜 묘사함으로써 더욱 표현적이 되고, 명료한 묘사보다는 불분명한 묘사가 오히려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