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흑인 노예의 탄생

(프란시스코 피사로)

 

지난번 콜럼버스 이야기를 다루면서 서구 지배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무차별 학살에 관해 얘기했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 대륙과 쿠바, 아이티 그리고 바하마를 갔다 온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는 곳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족의 비극은 반복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와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멕시코 지역의 아스텍(Aztec) 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을 파괴했다. 그 결과 스페인 정복자들은 현재 멕시코 지역과 그와의 중남미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플로리다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상 무역 및 정복에 점차 참여하기 시작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16세기 영국인들은 신세계에 대한 뒤섞인 감정을 가졌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1588년 칼레 해전(Naval Battle of Calais)에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당하면서, 이후 해상권은 영국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렇게 해서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 타운(Jamestown)이 건설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지역에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 타운이 건설 된 이후 영국에서 미국 대륙으로 도망치거나, 출세를 위해 오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16209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소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들이 그러했다. 이후 현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보스턴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매사추세츠 동부 지역에 찰스타운, 뉴타운, 록스베리, 콩코드 등의 새로운 타운들이 건설되었다.

(1637년 영국 원정대의 피쿼트족 마을을 공격하는 모습)

  

1607년에 건설된 영국의 제임스 타운에선 2, 3년 동안 식량난과 기아가 지속되었다. 워낙 심각했기에, 시체를 파먹는 일이 있을 정도였고, 제임스 타운에 거주하던 500명 중에서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몇 명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원주민들에게 도망쳤다. 시간이 흐른 뒤 제임스타운의 지배자는 포와탄족들에게 그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포와탄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영국 이주자들은 원주민 마을을 파괴했고, 무차별 학살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원주민들은 영국 이주자들이 증가하자 347명의 영국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이후에는 전면전을 벌였다. 결국, 영국 이주자들은 그들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했고, 원주민들에게 무차별 보복을 감행하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도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피쿼트족(Pequots)과 전쟁을 벌여 대량학살을 벌였고, 원주민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당시 흑인들을 대량으로 실었던 노예선)

 

영국인들의 북미 대륙 정착이 시작되면서 17세기 중반에는 흑인 노예제도가 버지니아를 비롯한 미국 남부에서 확산됐다. 스페인이 대서양 해상권을 장악했을 시기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노예들을 자신딜이 만든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이송했고, 이후에도 노예들을 착취했었다. 아프리카 흑인이 북미대륙에 처음 도착했던 것은 1619년에 대략 20명이 제임스 타운에 도착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끌려온 흑인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유럽에서 온 계약 하인들처럼 취급받았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하기도 했다지만, 흑인들이 하인으로 등록되었다 하더라도 백인 하인과 다른 존재로 간주됐고 다르게 대우받았을 것이며, 사실상 노예랑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미 대륙 또한 흑인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계약 하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고, 계약 하인들의 이주 숫자가 점차 줄었으며, 그에 따른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또한, 1650년대와 1660년대부터는 남부 식민지에서 평생 노예들을 위한 법령을 제정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의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여 1700년의 버지니아 식민지에는 총인구의 12분의 1에 달하는 6000명이 존재했고, 1763년에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7만 명의 노예가 존재했다. 1637년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노예선이 매사추세츠를 출항했는데, 그 배의 창고는 수감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가로 0.6m, 세로 1.8m의 족쇄가 달린 선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배에다 실어 대량으로 북미 대륙에 옮겼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은 1492년부터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대략 500만 명이 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기간의 식민지 미국의 경제는 노예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흑인 노예선를 표현한 그림. 흑인들은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흑인 노예들이 남부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미국도 주로 남부에 흑인 인구가 몰려있고, 북부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북부는 상업 및 공업이 발달한 곳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부 또한 자신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흑인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창출했다

(북미대륙에 와서도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지배받고 착취당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흑인들의 반란 및 저항은 없었을까? 물론 없진 않았다. 1687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노선네크에서 노예들이 지역에 있는 백인을 모두 죽인 후 장례식을 이용해 탈출하려고 한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었고, 1739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스토노에서 노예 20명이 반란을 일으켜 창고지기 2명을 죽이고 총과 화약을 훔쳐 남쪽으로 달아나면서 도중에 사람들을 살해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 반란은 다른 노예들도 가담해 대략 8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는데, 민병대가 그들을 강경진압하여 50명의 흑인이 죽고 봉기가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반란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도망치다 발각되면 백인들과 추격대에게 바로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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