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가을 날, 리치몬드 상수리나무집>유화,15F,2013

 

요즘에는 영화에만 푹 빠져서 그림도 거의 못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 학기부터 ‘영상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기로 했는데 모처럼 준비하는 강의록 때문에 머릿속이 빙빙 돌 지경입니다. 한동안 대학 울타리를 벗어나 있었던 터라 다시 강단으로 돌아갈 일이 태산 같습니다. 마음이 설레면서한편으론 부담도 되고. 아무튼 이리저리 복잡한 심정입니다. 

 

영상예술에 대한 수업이다보니 영화는 원없이 맘껏 볼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새벽녘에도 졸린 눈을 부릅뜨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제 모습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사실 하루에 영화 3편 보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골이 나서 대여섯 편쯤 너끈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온종일 영화만 보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종종 메모도 하고, 관련 서적도 들춰보면서 나름대로 호기심을 증폭시킬 도리밖에요.

 

조금 전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헤드’를 감상하다가 결국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림으로 따지면 일종의 추상화 같아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전환 모드가 필요합니다. 실험적인 요소나 충격적인 장면들, 흑백 영상의 강렬한 명암 대비, 독특한 질감 처리, 이미지들의 괴이한 환상, 거기다 은근히 소름끼치는 사운드까지, 정말이지 사고의 층을 다각적으로 요구하는 작품이라 할 만합니다. 

 

<이레이저헤드>미국,1978.감독:데이비드 린치

 

어느 순간 남자 주인공의 머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형체의 머리가 붙어 있습니다. 어쩌면 죽은 아이, 혹은 스스로 없애버리고 싶었던 자아가 이런 모습으로 달라붙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제목 '지우개머리'와도 관련된 주요 상징이자 키워드 같은 것 아닐까요.   

 

'영화를 볼 때 모든 걸 해석하려 들지 말고 영상이나 음향, 스토리, 구성, 음악, 연기 같은 것들 중에 한 가지 요소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은 감상법이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레이저헤드’같은 작품은 어느 방향에서부터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군요. 감상의 폭을 확 줄여서 좁은 시야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혹은 아예 아무런 개념 정리 없이 무작정 그냥 볼 수도 있고.... 린치 감독은 자기 영화의 절반이 음향이라고 했다지요.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영화 배경에 깔리는 괴상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려니 사실 속이 좀 울렁거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볼륨을 가능한 줄였는데 도무지 심심해서 볼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대충 건너뛰어도 될 일들이 더러 있겠지만 컬트 무비 분야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아무나 쉽게 묵과할 수 없는 주요 작가입니다. 게다가 대학 때 그림을 전공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라 개인적으로 더욱 관심이 쏠립니다. 전에도 두어 번 이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은 졸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 먹고 재도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침부터 신선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레이저헤드>미국,1978.감독:데이비드 린치

 

아이가 태어납니다. 원했던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의 모습도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새의 머리 같기도 하고 물고기 같기도 합니다. 아이 엄마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면서 짜증을 내더니 칭얼대는 애를 그냥 떼 놓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는 고열에 시달리고, 울음소리는 더욱 사람의 신경세포를 자극합니다. 남자 주인공 밖에는 아픈 아이를 돌 볼 사람이 없습니다. 내 앞에 이런 상황이 만약 펼쳐진다면, 혹은 당신이 그 남자 입장이 된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영화에서도 뭔가 '끔직한 일'이 벌어집니다.

 

작가는 이 영화를 5년에 걸쳐서 제작했다고 합니다. 5년...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만큼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짜인 뭔가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스토리 전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상징과 암시들로 가득찬 초현주의자들의 지하실 같다고나 할까요. 딱히 이해되는 장면이 많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그래서 이레이저헤드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칠 수 없는 그런 악몽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레이저헤드>미국,1978.감독:데이비드 린치

 

일명, '라지에터 걸'입니다. 불길한 어둠 속 미로 같은 영화 안에서 그래도 가장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양쪽 뺨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 건 스팀이 올라오는 라지에터처럼 '쎄엑쎄엑' 소리를 내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입으로 그런 소리를 내려면 양쪽 볼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해야 한다고... 아이는 칭얼대고, 거대한 환풍기 소리 같은 것도 어디선가 들리고, 라지에터 돌아가는 소리까지....영화 내내 그런 소음들이 마구 뒤섞여 끊임없이 들려온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각이 예민하신 분은 가능한 볼륨을 줄이는 게 좋습니다. 무성 영화나 다를 바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운드를 너무 줄이면 영화 보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라지에터 걸의 달콤한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답니다.     

 

이 글 맨 앞에 소개한 그림은 지난해 11월에 다녀온 리치몬드 타운의 ‘하얀 울타리가 있는 집’의 외부 전경을 담은 모습입니다. 한동안 영화 관련 서적이나 영상 자료에만 빠져 저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는데 그나마 이런 공간에 그림이라도 올릴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 아무래도 그림 얘기보다는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수업 중에 어떤 얘기들이 나왔는지, 최근에 본 영화들을 제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 펼쳐지겠지요.

 

영화는 사진이나 글, 그림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의 집합체이면서 아직 개척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는 영역이니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근에 인상적으로 본 영화에 대한 짤막한 감상문 같은 것도 있으면 올려 주세요. 맛깔스럽게 댓글 다는 재주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읽고 참고하겠습니다. 영화 내용과  별 상관이 없는 졸작이나마 제 그림도 가능한 계속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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