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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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이 시대에 가장 좋아하는 한국작가를 꼽으라고 할 때 문학팬들이 반드시 언급하는 작가 중 한 이 김연수일 것이다. 김영하와 더불어 다작을 하기로 유명하지만, 다작을 하는데도 결코 가볍지 않은 글을 쓰는 사람. 소설가이지만 시처럼 아름다운 문체를 쓰는 작가. 그럼에도 간질간질한 미사여구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깊은 통찰과 사색을 담아놓은 작가.

하지만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내가 김연수를 처음 만난 건 2년전 막 발간되었던 그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였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김연수라는 작가의 글에 푹 빠져들었지만 팬이 되었다고 할 순 없었다. 팬이 되기에는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이 딱 한 권 뿐이었으니까.

 

 

 

 

이상하게도 나의 독서목록에서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자꾸 뒤로 밀렸다. 너무 맛있는 음식은 아껴먹고 싶은 마음에서였을까. 정확하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심리였을 거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 반해, 당시 김연수 작가의 책을 몇 권 더 샀는데도, 다시 그의 소설을 읽기까지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 읽은 책은 <원더보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제 "김연수 작가의 팬"이 되겠다고 감히 결심할 수 있게 되었다. 뛰어난 가독성과 재미, 하지만 여러가지 곱씹어 보게되는 문장들과 소설의 주제,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여운까지. 김연수라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문학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분명 행운이다.

 

 


 

"나는 고아가 됐다. 이제 내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 p.30

 

 

소설 <원더보이>는 주인공인 15살 소년 정훈이 뜻하지 않은 사고 후 병원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 트럭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무장간첩이 몰던 차와 부딪히는 사고로 정훈은 유일한 가족인 아빠를 잃었다. 엄마는 정훈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15살의 어린 소년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고아가 되었다. 일가친척도 하나 없는 완전한 고아.

<원더보이>의 배경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4~7년이다. 당연히 시대적인 배경이 갖는 아픔과 사건들로부터 등장인물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흔히 1980년대를 다룬 소설에서 보여지는 우울함이나 처절함은 없다.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니다. 김연수라는 작가의 어조가 갖는 특징 상,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시간 또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시처럼, 별처럼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는 작가는 김연수 뿐이리라.

재밌게도 고아가 된 정훈은 사고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 사고 순간 보았던 강렬한 빛. 80년대에 한창 인기있었던 외국의 초능력 마술사 '유리겔러'의 내한 이후,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숟가락 부러뜨리기에 도전했던 것처럼, 어린 정훈은 사고가 나던 순간, 손가락으로 열심히 숟가락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찰 때문에 드디어 숟가락이 딱 부러지던 그때 사고가 났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큰 일이 벌어지던 그 순간 했던 일이 고작 숟가락 따위나 문지르는 일이었다니. 아빠의 마지막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니. 정훈은 심하게 자책한다. 그 죄책감은 분명 15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기 때문에, 정훈은 사고를 낸 무장간첩을 원망할 생각도 못했다. 아빠보다 숟가락에 집중하고 있던 자신의 한심함에 다른 이들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런데 하필 이 지점에서 정훈은 초능력이 생겼으니 아이러니할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는" ("못하는"이 아니다) 것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겪는 고통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한 나머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주려 하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이해받고 싶어"할 뿐이다.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점점 이기적이 되어간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은 역사 속에서 시대를 막론하고 대세를 형성했었다.

작가는 인간의 이러한 이기주의 경향을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건드린다. 자책감으로 외부세계와 고립되기 쉽상인 정훈(게다가 하필 정서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은​, 그러나 뜻하지 않게 얻게된 초능력 덕분에 거의 "반 강제적으로"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본심과 생각이 들리는데다, 상대방이 겪고 있을 감정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상대의 생각을 알고 감정을 공유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상대에 대한 이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을 과연 초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반드시 지향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않는, 그래서 결국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소설 <원더보이>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80년대의 한국은 민주화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1980년에 들어선 신군부정권 치하의 시대는 암울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정치적 자유의 억압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김연수 작가는 영리하게도 '소통'을 잃어버린 개개인에 집중함으로써 시대의 아픔까지 아우르는 전략을 택했다.

서로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원더보이" 정훈이 보여주는 초능력은 놀랍다. 정훈이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출연하는 연말 특집쇼에 초대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때, 정훈의 초능력에 압도된 관객과 시청자들은 그 순간 정훈과 똑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사회자의 마음을 읽은 정훈과, 정훈의 이야기를 통해 정훈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은 관객들. 서로 교감하는 과정을 "초능력"이라고 묘사하면서, 작가는 "소통"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독자에게 전한다.

​시대상과 현대인들의 속성, 두 가지를 모두 한꺼번에 풍자하고 있는 이 절묘한 상징은 쉽게 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작을 하는 작가임에도 김연수의 소설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쓸데없이 감성적이거나 너무 진지해서 무겁지도 않은데다, 문장 하나하나를 많이 고민하며 쓴 티가 역력하다. 많은 이들이 <원더보이>를 살짝 어렵게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전체 스토리가 툭툭 끊어지는 듯 보여 단번에 스토리가 전하는 메세지를 찾기란 쉽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사고의 과정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사실 김연수 작가의 이러한 특징은 <원더보이> 이후에 나온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더 강해져서, 그 소설에서는 화자, 시점, 스토리가 각 챕터마다 바뀌기 때문에 전체적인 스토리가 더 툭툭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후자를 먼저 읽은 덕분인지, 다행히 나는 <원더보이>가 상대적으로 덜 어렵게 느껴졌지만, 다른 소설에 비해 스토리에 감춰진 작가의 의도, 다시말해 작가가 이 책에 일부러 담지 않은 (그러나 말하고 싶었을) 말에 대해 고민해보는 과정은 훨씬 길었다.

"천재적으로 책을 읽으려면 작가가 쓰지 않은 글을 읽어야만 해. 썼다가 지웠다거나, 쓰려고 했지만 역부족으로 쓰지 못했다거나, 처음부터 아예 쓰지 않으려고 제외시킨 것들 말이지. 그것까지 모두 읽고 나면 비로소 독서가 끝나는 거야."  - p. 234

 

 

​<원더보이>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 중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80년대에 청춘의 시절을 살아왔을 작가로서 그 시대적인 슬픔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는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시대상황에 대한 고민"일 테니까 말이다.

"원더보이" 정훈의 초능력은 전국적으로 알려진다. 운이 나빠 사고를 당했지만, 상대가 무장간첩이었다는 이유로 정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멋지게 전사한 "애국자"라 칭송받게 되었고, "초능력"을 가진 정훈은 그 능력을 국가를 위해 쓰라고 강요받는다. 전형적인 군부정권의 '앞잡이' 또는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로 묘사되는 "권대령"은 <원더보이>에 등장하는 유일한 '악역'인데, 이는 그가 어떤 나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물론 정훈에게 국가가 지급한 위로금을 가로챈 건 있지만), 권대령이 군사정권에 아부해서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는 설정 때문이다. 소설 상에선 "권대령"이 나쁘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된 부분은 없다. 그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독자들이 "악역"이라고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것 뿐.

권대령은 정훈의 초능력을 이용하여, 데모 (오늘날 기준으로 '민주화운동') 주동자들을 색출한다. 정치 싸움같은 것엔 관심도 없던 어린 소년은 순진하게 자신의 초능력을 사용했다. 하지만 권대령이 내미는 사람들의 소지품을 만지면서 그들이 느꼈을 고통이나 감정을 전해준 것은 의도치않게 국가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즉, 정작 국민과의 소통은 거부했던 국가는, 소통을 요구하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되려 '소통'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작가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권대령을 통해 "쓰지 않은 이야기", 즉, 소통이 억압되었던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말하고 있다.

 

 

 

 

정훈이 이 상황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자신의 초능력이 사람들을 잡아들이는데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정훈은 토악질을 하다가 이내 기관을 탈출한다. '국가'를 상징하는 권대령은 모든 개인을 국가의 부속물로 보았다. 8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투쟁은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었다.

국가와 개인 중 누가 우선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대부분 '개인이 우선이다'라고 대답하지만, 의외로 국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사례는 역사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관점이 전근대 시대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신분제가 없어지고 민주제도가 도입된 광복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관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80년대의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역행한 시대착오적인 모순에 빠져있었고, 국민들은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던 민주적 가치를 시대를 앞서서 주장했다. 너무 구시대적이고 너무 진보적인 두 세력이 맞붙었던 그 시대는 아팠고 우울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은 현대 사회도 다르지 않다. 충돌의 도구로 "물리적 폭력" 대신 "언어적 폭력"이 주로 쓰인다는 점만 바꼈을 뿐이다.

정훈은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권대령으로부터 탈출함으로써 국가에 간접적으로 항거한다. 하지만 권대령은 초능력 대회의 또 다른 참가자였던 '이만기'와 쌍둥이들을 내세워 계속해서 정훈을 쫓는다. 결국엔 실패하지만. (이는 '정훈'으로 대변되는 소통을 중시하는 국민이 결국 '권대령'으로 대변되는 국가를 이긴 역사적 결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권대령에게서 탈출한 정훈은 '강토 형'을 만난다. 하지만 강토형은 사실 '희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정훈은 강토형이 희선씨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희선씨를 좋아하면서 정훈의 초능력은 반대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뜻이다. 하늘의 별을 보며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을 이어가던 원더보이는, 희선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비로소 초능력에 의한 타의적으로가 아닌, 자의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꿈꾸게 되었다.

이는 정훈을 쫓아다니던 이만기도 마찬가지였다. 권대령 혹은 국가에게 절대 충성하던 만기는 같이 다니던 이란성 쌍둥이의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역시 초능력을 잃어버렸다. 초능력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국가에 쓸모가 없었다. 권대령은 "사랑은 국력의 엄청난 손실"이라고까지 말한다.

만기는 초능력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다시 말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서) 정훈과 화해했고, 정훈은 그런 만기에게 자신이 예전에 권대령에게 했던 말을 전수해준다. "인구를 늘리는 것으로 국가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이 부분에서 피식,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김연수 작가는 '유머감각'도 뛰어나다!)

​"토요일의 종각역 부근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으니까.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의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나갔지.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며 우리가 맞잡은 두 손.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던 그 뼈와 근육과 핏줄 들이 내가 아는 사랑의 거의 전부야. 그것 말고 또 무슨 사랑이 있을까?" 

​-P.280~281.

국가와 개인은 역사 속에서 늘 상호 공존해야 하는 관계였지만, 방식은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더이상 억압하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인의 행복을 보장하고, 개개인이 서로 사랑하고 소통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면​, 그들이 결국 국가의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것이니까. 메세지는 너무도 평범하지만, 이것을 풀어가는 방식에서 김연수 작가는 매우 탁월하다. <원더보이>를 읽는 내내, 이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메세지는 인간의 기본적 특성인 "소통"을 "초능력"으로 설정한 역설을 통해 도리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정훈의 첫사랑이었던 희선씨가 강토라는 이름으로 남장행세를 한 것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이수형이 국가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아 죽고 난 다음부터였다. 이수형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3.14까지만 기억하고 있는 원주율을 숫자에 자기만의 암호를 붙여 무한대로 외우고, 1980년의 종로일대의 모습을 토씨하나 안 빼놓고 기억하지만, 결국 수형은 그 "기억 능력"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는다.

 

작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은 그 시절을 수형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능력 때문에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수형은 어떠한 기억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그의 기억의 방을 차지하고 있던 희선과 재회하게 되면서, 수형은 다시 "기억하기"를 시작했다. 희선과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 희선과 함께 걷는 이 거리. 희선과 만난 오늘의 날씨 등. 이전에는 국가의 도구일 뿐이었던 수형의 "기억능력"은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수형은 "기억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정훈과 수형을 통해 작가는 말한다. 타인과 소통하는 것, 순간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 소박하면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마땅히 노력해야 하는 이것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계속되고 있다고. 예전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실체가 억압적으로 그랬다면, 지금은 우리 스스로 이것을 구속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때문에 그 시절을 잊지 말라고. 이 가장 기본적인 것을 얻으려고 희생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시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1천억 개의 별들이 있는 1천억 개의 은하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아빠가 살았던 42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죠. 별들의 숫자에 비하면 그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그 빛들을 나눠서 쪼일 수 있었다면 아빠는 평생 매초당 7조5499억5047만2325개의 별빛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이예요. 그렇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1초였을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1초라는 걸 알았다면 아빠는 울지도 않았을 텐데요. 아빠 인생의 1초가 그렇게 많은 빛으로 가득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말이죠."  - p. 36~41.

 

 

소설 <원더보이>에는 "별"과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정훈의 입을 빌려 작가는, 광활한 우주에 총 몇 개의 별이 있는지 아냐고 독자에게 직접, 반복해서 묻는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 그리고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은 이미 수억 광년 전에 존재했던 별들이다. 지구로부터 수억 광년 멀리 떨어진 별들이 지구를 통과해 우리 눈에 보이기 까지 걸리는 수억 광년의 시간들. 이 마저도 빛의 속도로 계산했을 때의 시간이니, 우주의 광대함은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 규정할 수 없다. 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정훈이 초능력이든 사랑이든,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했을 때, 작가는 "시간이 멈췄다"고 표현했다. 멈춘 시간은 정훈이 내면적으로 성장, 즉 소통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정훈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희선씨와 수형을 비롯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간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없는 거나 다름 없는 우주의 별들이, 너무 많아서 특별한 것이라고 발전하는 정훈의 사고는 그의 성장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수많은 별빛을 1초씩만 받는다 해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은데, 4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고로 돌아간 아빠의 삶은 얼마나 안타까운가를 생각하다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특별한 삶이었다고 규정하는 부분에서 전율이 일었다.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한없이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픔을 딛고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정훈은 실제 나이 15살보다 어른스럽다. 그리고 정훈의 이런 모습은 그 시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사랑을 시작한 소설 속 희선씨 및 현실의 모든 한국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기도 했다. ​

 

​"저는 이새인이라고 합니다. 독특한 이름이죠.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라고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막내딸이 당신의 뒤를 이어서 새를 연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자랑스러우셨을까요? 제가 서럼 자유롭다면 그 새들을 따라 휴전선 너머로 날아갔겠죠. 당장 아버지를 찾아가 그 품에 안겨서 울었겠죠." ​ -p.294~296. 

 

   

 

타인과의 소통을 배우며 성장한 정훈은 다시 본인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소통을 통한 성장을 경험했기에, 자신에게 집중하는 정훈은 더 이상 이기적이지 않다. 정훈은 얼굴도 본 적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빠와 엄마가 서로에 대해 느꼈을 감정이 궁금해졌다. 자신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나를 낳아준 엄마의 이름은 무엇일까.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났을까.

아빠의 유물인 수첩을 읽었을 때는 아빠와 엄마가 조류 밀렵꾼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쓰여지지 않은 내용을 읽어내기" 과정을 통해, 엄마는 조류도감을 만들기 위해 아빠와 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를 사랑한 아빠는 밀렵을 그만두었고, 대학생이었던 엄마는 밀렵꾼인 아빠의 사랑에 화답했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함에 따른 소통", 그것이었음을 정훈은 다시 한번 확인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도 정훈은 이 과정에서 엄마가 남겼다는 편지까지 받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북쪽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엄마가 그리움을 담아 쓴 편지. 그 안에는 곧 태어날 정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놀라운 것이, 김연수 작가는 1980년대의 시대상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까지 다루면서 한국 현대사 전체를 다루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산만하다거나 오버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과하지 않지만 임팩트를 남기는 선에서, 작가는 "가족의 해체"라는 공통 요소를 통해 분단과 1980년대의 시대적 아픔을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텍스트 밖에서 2000년대를 살아가는 현재 사회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매일 밤 우리는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 별들을 올려다봤습니다. 그 별들을 보면서 우리는 번갈아 소원을 말했어요. 내년 봄이면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편지조차 주고 받을 수 없는 일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이 아이가 자라날 1970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 p.298. 

 

 

 

정훈의 엄마 '이새인'이 1969년에 북에 있는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는 1986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들인 정훈이 읽게 되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도 유전이 된 걸까. 분단이라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아버지와 헤어진 엄마는 아들이 자라날 세상은 달라져있길 그토록 바랐다. 하지만 아들이 자라고 있는 세상은 그 나름의 시대적 아픔이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정훈의 자녀는 1990년대 후반에 촉발된 경제위기 여파로 2000년대의 '88세대'의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세상이 더 고통스러울까.

세상은 조금씩 변해왔다. 새인의 바람처럼 부모와 자녀가 생이별을 하는 세상은 적어도 1980년대엔 덜했다. 정훈은 사고로 아빠를 잃긴 했지만, 그것은 분단시대의 잔재인 '무장간첩' 때문이었지, 80년대의 상황 때문은 아니었다.​ 새인의 바람처럼, 정훈도 새로운 세상을 꿈꿀 것이다. 그것은 90년대를 지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또한 앞으로의 세상은 나아지기를 꿈꾼다.

인간은 동시대의 사람들과만 소통하지 않는다. 세대와 세대가, 각각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소통한다. 자신의 소망이 반영된 세상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물려받은 그 세상에 또 다른 소망을 담아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이것이 세대를 초월하여 소통하는 인간의 방식이다.

​"1987년 여름이 되자, 베드로의 집에서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 p.319

<원더보이>를 읽는 내내 아련한 감정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너무 어렸던 시절이라 그 때에 대한 기억은 동네에서 아이들과 뛰어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책을 통해 30년도 더 된 시절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어둠의 시대라고 회고하는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 <원더보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밝다 못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쓰라린 아픔을 이겨낸 덕분에 더 반짝이는 느낌이랄까. 담담하게 풀어가는 작가의 어조도 이러한 분위기를 거든다. 작가는 시대적 상황과 '고아'라는 개인적 상황 속에서 15살 소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그저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에 대한 고민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로.

김연수의 대개의 작품들이 그렇듯​<원더보이>는 수많은 상징과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아무래도 독자가 "천재적 책읽기"를 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문학들이 그렇겠지만, 유독 김연수의 소설은 책장을 덮고 나서도 독서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원더보이>를 읽은지 1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원더보이>에 대한 나의 독서는 끝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감춰놓은 새로운 내용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겠지. 그래서 김연수의 작품은 언제나 강한 여운을 남긴다. 한번 그의 작품을 읽고 나면, 한동안은 계속해서 그의 책만 읽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김연수 소설이 낳은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다시 <원더보이>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러한 부작용을 이겨보려 했던 부질없는 노력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제는 "김연수 부작용"을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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