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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사능비 내리는 날, 카프카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영화 개봉했겠네. 영화 개봉을 앞둔 감독의 기분은 어떤 거니? 판결을 앞둔 심정이니? 아니면 개운하니? 오랜만에 편하게 잘 수도 있니? 댓글도 읽고 별점 같은 거에도 신경 쓰니?

 나도 지난 수요일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어 방송했어. 다른 어떤 때보다도 두려움을 갖고 방송을 만들었어. 모든 것은 방사능비에서 출발해. 방사능비가 내리던 날,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어디서 비를 보고 있었니? 나는 이미 예전에 내가 방사능비를 맞아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어. 방사능비가 내리던 거리를 걸어봤던 것 같은 느낌 말이야. 방사능비의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난 기억을 더듬었고 마침내 떠올렸어. 난 히로시마에 관한 글들을 읽었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 속의 방사능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내렸던 비야. 미국의 맨해튼 계획에 따라 개발된 우라늄 핵폭탄 리틀 보이는 8시 15분에 터졌어. 그리고 바람이 불고 불길이 치솟고 검은 비가 내렸어. 그것이 방사능비야. 그 해의 원폭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대략 70만 명이 피해를 당했어. 그 중 10%인 7만 명이 한국인이야. 히로시마에 군수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가족들이 많았던 거지. 한국인 7만 명 중 4만 명이 죽었어. 살아남은 3만 명 중 2만 5천 명 내지 6천 명이 태풍을 뚫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말이야. 2천 명은 북한으로 갔어. 나머진 남한 어딘가에 정착했어. 그들은 대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 무사히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이 궁금증에서 이야긴 시작해. 나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아갔어. 그렇게 길을 나설 때 내게 있던 궁금증은 무엇이었을까? 방사능비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일까?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취재하면서 점점 알게 되었어.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낯설고 잔인한 운명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그것이 어떤 삶과 죽음을 불러오는지 나로선 알 수 없었던 거야. 그날 히로시마에서 방사능비를 맞았던 사람들은 그날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결코 알지 못했어. 그리고 그 일이 평생을 따라다니리란 것은 더구나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어.

 그들 중 60%는 합천에 살고 있었어. 우리가 해인사나 전직 대통령의 고향으로 아는 그 합천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합천의 또 다른 별명은 한국의 히로시마야. 그렇다면 왜 합천일까? 일본강점기 어느 날 합천에 신작로가 깔렸겠지. 그 신작로는 부산까지 뻗었어. 부산엔 시모노세키까지는 가는 배가 있었어. 그런데 합천은 농지가 20%밖에 되질 않아. 그나마 있던 농산물을 수탈로 뺏기고 나면 정말로 굶을 수밖에 없는 땅이었어. 그래서 누구는 징용으로 누구는 먹고살 돈을 벌려고 어느 날 아침 신작로를 따라 히로시마로 떠난 거야. 나는 합천에서 많은 걸 봤어.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피폭자란 걸 비밀로 하고 가난, 차별, 냉대를 견뎌 냈어. 이런 할머니를 만났어. 1945년 그 할머니는 다섯 살이었어. 8월 6일 그 할머니의 엄마는 장사하러 나가고 언니와 오빠는 학교에 갔어. 집엔 그녀와 외할아버지만이 있었어. 그런데 가족들이 나가자마자 폭탄이 떨어졌어. 그 뒤로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돌아오질 않았어. 그래서 어린 소녀는 외할아버지랑 둘이서 손잡고 배타고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외할아버지는 이내 돌아가시고 말아. 혼자 남은 소녀가 어떻게 자라서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까?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만 말해. 남의 집 살이도 하고 나물도 뜯어 먹고 살았다고만 하지. 한 할머닌 다섯 살 때 피폭되었는데 입술은 있어도 말은 못해. 그녀가 말 한 마디를 하려면 온몸을 뒤틀어야 해. 너- 무- 힘- 들-어.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지. 역사가 저지른 일은 개인의 몸 위에 그렇게 떨어졌어. 지금 돌아온 사람 중 90%가량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돼. 대부분 먹고사느라 자신이 왜 아픈 건지 고통의 원인도 모르는 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 갔어.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 평생 조롱거리가 되는 거야. 난 피폭자들이 어떻게 죽어갔을까? 상상만으로도 비통해. 말테의 수기에서 아이들은 조그만 죽음을, 어른들은 커다란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문장이 나와. ‘여인들은 그녀들의 젖가슴에 남자들은 그들의 가슴에 죽음을 안고 있었다.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장은 이런 상황에선 슬픔만 불러 일으켜. 이 사람들은 진정 자신의 죽음을 지니지 못한 채 죽었어. 죽으면서도 피폭자들은 모든 것이 낯설었을 거야. 삶조차도 죽음조차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죽음, 마치 내 젖가슴처럼 내 가슴 안에 있는, 내 삶의 정직한 반영인 나만의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 그저 우리도 어느 날 통계 수치의 한 명으로 사라지고 말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들에겐 가난과 질병과 냉대와 차별 수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의 고통이 더 있었어. 그들이 결사적으로 피폭자임을 숨긴 것은 자녀 또한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어.

 피폭자 2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아파. 이런 2세 중에 마치 전태일 같은 한 사람이 등장해. 1970년생 김형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은 처절한 삶을 살았어. 그는 2005년에 죽었어. 나는 죽은 남자의 방,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죽은 남자의 방에 들어가 그의 일기장을 봤어. 어쩌면 그가 쓴 뒤로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으로 그 일기장을 읽은 사람일지도 몰라. 거긴 아직 십 대인 그가 나와. 그는 아파. 그런데 왜 아픈지 몰라.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가 생겨. 병약한 그로선 도저히 사랑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해. 그녀 눈에 내가, 이렇게 아픈 내가 어떻게 보일까? 그는 불안해해. 그러나 사랑은 간절해. 그녀의 모든 걸 눈여겨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여. 그녀가 자신이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을 마신 것도 일기장에 적어. 그 사랑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까? 그는 끝없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물어. 나는 평범하게 사랑하고 사랑받고 가족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살 수 있을까? 너무나 평범하지만, 인간적인 그 꿈을 내가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는 수도 없이 물었을 거야. 그는 2001년에 되어서야 자신의 병이 뭔지 알아. 면역 글로블린 결핍증이란 희귀병이었어. 의사들은 김형률 몰래 그 병에 대한 논문을 써. 그건 그의 병이 모친의 피폭 때문에 생긴 유전적 질환일 확률이 높다는 논문이었어. 그는 그 뒤로 원폭에 대한 모든 자료를 찾아 읽어. 그러면서 고민을 해.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깊은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병든 몸으로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제 그의 정체성은 원폭 2세 환우였어. 그는 거기에 아직도 뛰는 심장 전부를 걸어.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그가 지난달의 나처럼 합천을 찾아가. 나와 같은 곳을 걸었어. 그리고 피폭자 집을 집집이 방문해.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각종 질병을 앓고 그것을 개인의 불행으로 안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간신히 살아가는 것을 보았어. 그는 정부와 시민 단체를 끝없이 찾아다녀. 방사능으로 아픈 사람들이 우선 생존할 수 있게는 도와주자고. 최소한으로나마 인간답게 살아가게는 도와주자고. 그리고 그때마다 정부의 관료들에게 들었던 말은 "방사능 유전 여부는 의학적으로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였어. 그렇지만, 어떤 개인이 자기가 아픈 원인을 자기 혼자 힘으로 증명해 낼 수 있겠니? 이것이 지금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 아니니? 수많은 산재 환자에게 벌어지는 일 아니니? 그는 원폭 2세 환우회를 조직하고 실태조사와 의료 지원, 생계 지원 등의 내용을 포함하는 특별법 초안을 만들어서 의원들을 찾아다니지. 이 특별법은 17대 국회 때 발의되어 낮잠만 자다가 폐기되고 말아. 아마 그 사이 또 누군가는 죽었겠지. 그리고 지금 18대 국회 때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2년 넘게 잠들어 있어. 그는 결국 죽고 말아. 그의 좌우명이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였는데 말이야. 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라고 말할 때 그건 누구의 삶이었을까? 결코, 자기 자신만의 삶은 아니었어. 그에겐 자신처럼 앓는 사람에 대한 강한 연민이 있었어. 지금 방사능이 무엇인지 평범한 시민도 시금치와 우유와 생선을 걱정하고 있어. 반찬을 걱정하는 우리 곁을 원인도 모르고 피폭된 사람들이 지치고 보잘것없는 몸을 이끌고 울면서 지나가고 있을지도 몰라.

 난 김형률의 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카프카의 성을 생각했어. 카프카의 성은 측량사 k가 성에 들어가고자 하나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마는 이야기야. 다른 많은 것은 젖혀두고 관료주의의 하수인과 옹호자들 때문에 성이 생각났던 거야. (카프카의 성에도 그런 사람은 넘쳐나) 김형률과 아버지는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 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관료를 만났어. 그들은 마치 카프카의 성에 있는 사람들처럼 김형률이 성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 그 과정에 기만적인 약속, 무시, 태만, 속임수, 핑계, 모욕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그것이 김형률과 피해자들을 얼마나 애타고 초조하게 안달 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이 남아. 성이 안갯속에, 헛된 희망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 세상의 끝으로 추방된 원폭 피해자들을 받아주는 성은 있을까? 김형률은 성문 앞에서 지금도 문지기와 씨름하는 것은 아닌가? 그 뒤에 이어지는 끔찍한 상상은 쓰고 싶지도 않아. 다만, 성문이 성난 군중의 고함과 함성 속에 열리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도 제대로 떠올리고 싶은 밤이야. 성과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싶어.

 p.s 그런데 너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느 중년 부인에게 닥쳐온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 오늘 여주인공인 배종옥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어. 나도 곧 볼 참이긴 하지만 그때의 죽음은 고유한 죽음이니? 그녀는 어떻게 죽음을 맞게 했니? 그녀에게 어떤 죽음을 줬단 말인가? 너는. 궁금해. 그리고 <제인 에어>에 대해선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다음 주에 편지 쓸게. 다만, <제인 에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로체스터의 부인, 다락방의 미친 여인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봤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 그녀의 이름은 진 리스야. 아마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늙고 미친 이방인 여인이란 말을 들어봤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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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성                

       카프카/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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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성에도 그런 사람은 넘쳐나) 김형률과 아버지는 보건복지가족부 공무원, 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관료를 만났어. 그들은 마치 카프카의 성에 있는 사람들처럼 김형률이 성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어. 그 과정에 기만적인 약속, 무시, 태만, 속임수, 핑계, 모욕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지, 그것이 김형률과 피해자들을 얼마나 애타고 초조하게 안달 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질문이 남아. 성이 안갯속에, 헛된 희망 속에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 세상의 끝으로 추방된 원폭 피해자들을 받아주는 성은 있을까? 김형률은 성문 앞에서 지금도 문지기와 씨름하는 것은 아닌가? 그 뒤에 이어지는 끔찍한 상상은 쓰고 싶지도 않아. 다만, 성문이 성난 군중의 고함과 함성 속에 열리는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도 제대로 떠올리고 싶은 밤이야. 성과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는 꿈을 꾸고 싶어.  p.s 그런데 너의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어느 중년 부인에게 닥쳐온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어. 오늘 여주인공인 배종옥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어. 나도 곧 볼 참이긴 하지만 그때의 죽음은 고유한 죽음이니? 그녀는 어떻게 죽음을 맞게 했니? 그녀에게 어떤 죽음을 줬단 말인가? 너는. 궁금해. 그리고 <제인 에어>에 대해선 할 말이 좀 있으니까 다음 주에 편지 쓸게. 다만, <제인 에어>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로체스터의 부인, 다락방의 미친 여인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봤으면 좋겠어. 나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 그리고 또 한 명의 작가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지. 그녀의 이름은 진 리스야. 아마 그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선가 늙고 미친 이방인 여인이란 말을 들어봤을 거야.  ------------------------------------------------------------------------                      <성>                                카프카/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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