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만난 레닌 -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외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모든 이데올로기적 명령의 명시적 메세지는 그것이 함의하는 암시적이고도 외설적인 이면의 메시지에 의해 강화되고 보완되고 유지된다. 따라서 우리는 금기를 통해 욕망을 읽듯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것의 외설적 보충물을 파악할 수 있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이러한 접근이 가능한데, 관용을 강조하는 다문화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실제로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관용할 수 없는 혐오스런 타자이다. 그래서 관용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적 명령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지나친 향락의 과시로 너를 역겹게 하는 혐오스런 타자를 사랑하라'는 실로 난감한 주문이다.

자유주의적 주체는 자신을 이중구속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도무지 난감하고 가혹한 이같은 이데올로기적 명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할까. 그는 타자가 자신에게 관용을 보이는 한에서만 그에게 관용을 베푸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순응한다. 때문에 자유주의적 주체는 자신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 ‘타자’라는 이름에 근본적으로 부합하는 ‘진짜 타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불관용적이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타자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내면화시키면 시킬수록 자유주의적 주체의 심중에는 ‘진짜 타자’인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근본주의적' 분노가 고조되어 가는 것이다.

주체로 하여금 이렇게 양가적이고 분열증적 감정을 낳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의 이중구속을 극복하기 위해 주체가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지젝은 ‘자기파멸적인 행동’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자기 계발을 강조하는 이 사회에서 지극히 반-계발적으로, 디오니소스적으로 살아버리는 주체의 행위, 모두가 자본을 축적하여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자발적인 가난을 지향해버리는 주체의 행위,  치열한 경쟁이 당연시 되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도태를 열망하는 주체의 행위 등을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는 ‘자기파멸적 저항’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지젝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도착으로 표현되는, 주체의 이러한 맹목적이고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행동 속에 오히려 체제의 구멍을 환기시키는 어떤 해방적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지젝은 이와 같은 주체의 행동이 ‘혁명적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이것이 결코 ‘근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도착적으로 보일지라도 결코 근본주의적이지는 않을 것. 여기서 근본주의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타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도구화하는 행동 일체를 말한다. 즉, 지젝이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을 것, 그 어떤 대의명분도 내걸지 않고, 거기에 아무런 의존도 하지 않고, 오로지 명분 없이 저항할 것. 우리는 명분 없이 저항함으로써 비로소 저항의 상황을 스스로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저항은 결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헤매는 비장한 종류가 아니며,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유희이고 짜릿한 축제이다.

대의에 의존하지 않고도 저항할 줄 아는 주체, 자신을 수단화 시키지 않는 주체, 저항의 상황 자체를 즐기는 진정으로 해방적이고도 혁명적인 주체. 이러한 주체가 되기 위해 지젝이 가정하는 전제 조건은 일단 주체 자신이 이데올로기적 질서의 잉여적 지위에 처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든 구조적인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든 일단 그 자신이 좀처럼 정의되지 않는 사회의 불편한 잉여이자 사회의 상징체계를 교란하는 오점의 지위에 놓여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부조리'일 것. 그리하여 그 자신이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체계 안에서 어떻게든 배제되고 응징되고 억압되어야 할 불편한 존재일 것. 

이러한 존재의 조건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향해 ‘파괴적인 행동’을 감행함으로써 비로소 해방적 주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주체의 자기파괴적 행위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 있던 자들에게 일순간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끔찍한 상연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자체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해방적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자들의 일상을 순간적으로 교란시켜 그들이 ‘실재계적 순간’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해방적 주체'에 가장 근접한 인물을 한국 현대사에서 찾자면 단연 전태일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대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기를 파멸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잊혀진 대의를 환기시켰다.  

소외된 자의 자기파멸적 감행, 이는 곧 ‘마조히스트의 자기 고문’인 것인데, 이것이 야기하는 효과와 의의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조히스트의 자기 고문은 사디스트 목격자에게 만족을 주기는커녕 좌절만 안겨주며, 마조히스트를 다스릴 권력을 빼앗는다. 사디즘은 지배 관계를 포함하며, 마조히즘은 해방을 향한 필수적인 첫 단계다. 우리가 권력 기제에 종속될 때, 이러한 종속은 언제나 그리고 그 정의상 어떤 리비도의 투자에 의해 유지된다. 종속 자체가 그 나름의 잉여 향유를 만들어낸다. (...) 우리는 단순하게 지적인 사유만으로는 종속을 없앨 수 없다. 우리의 해방은 어떤 육체적 공연으로 상연되어야 한다. 나아가서 이런 공연은 분명히 마조히즘적 성격을 띠어야 한다. 자신을 되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상연해야 하는 것이다.”[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마조히즘-사디즘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끊을 수 있다는 것](440)

어떠한 대의명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근거하여, 극단적으로 자기 파멸적인 행위를 감행해 나가는 주체, 그러한 행위를 통해 일순간 실재계적 순간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질서의 붕괴와 자멸을 야기하는 주체, ‘행동화된 유토피아적 순간’으로서의 해방 운동을 주도하는 주체, 해방 운동 자체를 하나의 마조히즘적 카니발로서 향유하는 주체, 경건하지도 비장하지도 엄숙하지도 않고, 차라리 광적이고 잔혹하고 난폭하며 지극히 향락적인 주체. 이것이 곧 ‘지젝이 만난 레닌’의 한 가지 모습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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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3-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석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수양 2011-03-1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너무나 발랄하고 거침없이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데 저는 그걸 허겁지겁 따라가려니 숨이 벅차네요. 헉헉대며 적은 '부분적' 리뷰인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