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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준비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책방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여름에는 진주와 통영을 다녀왔다. 진주에서는 진주문고를, 통영에서는 봄날의 책방을 들렸다. 사실 이사 오기 전 살던 집 바로 앞에, 스토리지북앤필름이라는 독립 출판물을 다루는 책방이 있었다. 몇 번 구경차 방문하기도 했는데,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책방이라 낯섦이 컸다. 그때엔 책방을 내보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지난 여름 책방들을 둘러보며 자신감이 붙었다. 소박하게 운영되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게 잘 꾸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때엔 고향 청주에 있는 '꿈꾸는 책방'을 들렸다. 청주가 작은 도시라지만 내가 주로 다녔던 동남부와는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대체 무슨 서점인지 궁금했다. 토박이가 모르는 서점이라니... 알고 보니 바로 얼마 전에 생긴 곳이더라. 새롭게 단장한 서점은 깔끔하니 여러 책이 잘 갖춰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중이기도 하고... 책방을 둘러보다 우연히 손에 꼽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전부터 출판사는 눈여겨 보고 있었다. 작은 크기에, 선명한 표지의 책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본디 이 책과 더불어 《노자를 읽다》를 집었지만 당장 《노자》를 공부할 일이 없으므로 접어두었다. 게다가 매력적인 책을 하나 발견했던 까닭도 있고... 세권은 무리!! 《노자를 읽다》를 제친 그 매력적인 책은 다음에 소개토록 하자.


이 책의 덕목이라면 《논어》를 하나의 책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지금까지도 《논어》는 책 위의 책, 그러니까 경서의 자리에 있어 뭇 사람들의 숭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논어》를 읽을 길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논어》의 좋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바쁘지 그것을 읽으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많은 경우 《논어》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기는 커녕 기존의 통념을 확인하는 수준에 빠져버리곤 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공자가 하지도 않은 말을 공자의 말이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 이렇게 되면 결론은 간단하다. 공자님은 좋은 말씀쟁이!!


저자는 《논어: 선진편》을 중심으로 스승으로서의 공자의 모습을 조망한다. 공자의 다양한 면모가 있지만 스승의 모습에 주목하는 것은 《논어》를 공자와 제자들의 구체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이라 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논어》의 성립연대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 완벽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여 서술한 부분은 칭찬할만 하다 생각한다. 아쉬운 면이 있다면 〈선진편〉에 주목한 나머지 《논어》의 유명한 다른 구절들을 책에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논지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도 흠이겠다. 그러나 한 손에 들어오는 책에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인지도 모른다.


첨언하면 《논어》 연구자로서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부분이 별로 없어 후반부를 좀 심드렁하게 읽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 《논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혹은 이름만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 《논어》를 이해하기 위해 집어든 책이라면 충분히 제 몫을 다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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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수유너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만화 때문이었다. 예전 원남동 시절 한 층을 카페로 썼는데, 그 카페의 한쪽 벽은 CD와 LP로 가득 차 있었고, 또 한쪽은 만화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만화방에서나 보던 이중 책꽂이로. 만화의 불모지에서 자랐던 나는 그곳에서 한풀이했다. 물론 '너는 와서 만화만 보냐?'는 핀잔에 곧 고전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전에도 만화를 즐겨보는 편이었다. 그러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연구실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동시에 나오키의 《몬스터》와 《21세기 소년》을 만났고, 《베르세르크》와 《기생수》 따위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쥐》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후 기회가 나는 대로 좋은 만화를 찾아보고 있다. 최근에 읽은 만화(?)로는 데츠카 오사무의 《붓다》가 인상 깊었다.


내년 청소년 강의를 준비하면서 만화를 찾아보았다. 매년 1-2월 강좌는 좀 가벼운 텍스트를 선택하는데, 만화 - 웹툰 - 애니메이션 순으로 진행했다. 이제 다시 만화를 볼까 하는 생각에 여러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중 위 두 작품도 접하게 되었다. 《앨런의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재와 다른 사람의 실재 경험담을 작가가 만화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쥐》를 떠오르게 했다. 작가 기베르는 휴양지에서 주인공 앨런을 만나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곧 만화로 그려낼 생각을 한다. 마치 슈피겔만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면 작가는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독자는 오직 앨런의 이야기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을 경험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의 전개가 단순하다.


다른 실망스러운 점은 몹쓸 기대감 때문에 벌어진 것인데,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라 하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떠올리곤 한다. 아니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살벌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그러나 아쉽게도 앨런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전쟁의 끝자락에 투입되어 종전 이후에 벌어진 몇 사건들을 경험했을 뿐이다. 《전쟁의 앨런》이라지만 '전쟁'을 만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예외상태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무엇을 기대했던 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전쟁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지낸 이야기들은 따분했다. 한 개인의 과거사라는 점에서는 따듯한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에식스 카운티》는 어쩌다 책 소개를 읽게 되었는데, '천재적 작가'라는니 '캐나다의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느니 하는 찬사에 솔깃했다. 책을 구해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두꺼웠고, 속지도 꽤 두툼하여 뭔가 거친 느낌을 줬다. 흑백의 그림과, 거친 스타일로 만화를 읽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일본 소년 만화를 보다 그래픽 노블을 보면 보통 정적이라고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칸의 배열과 대사의 흐름이 마치 소설처럼 일정한 흐름을 갖기 때문이다. 《에식스 카운티》역시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커다란 그림과 굵직한 인물들의 얼굴 묘사가 있어 그림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


서문을 통해 알았는데 캐나다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다른 하나는 세스의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였다, 《스콧 필그림》은 그냥 표지만 훑어본 정도였고. 세스의 작품과 르미어의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외로움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무엇인가 결여된 삶을 살고 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삶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울한 이야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별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우울한 개인의 하소연을 듣는 듯했기에. 부연하면 그 외로움이란 오직 외로운 이들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일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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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디뻔한 책이 가진 장점이 있다. 복잡한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적 덕목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그런 이야기를 읽는 게 무슨 도움이 될지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된 세상을 따라 생각마저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느니, 사람에겐 결국 제 몸을 눕힐 공간만 필요하다느니, 돈은 곧 죄라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래도 반은 맞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착하게만 살아서 무엇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찾기 힘들어도. 

 

몇 달 전에 창비에서 '재미있다! 세계명작' 시리즈로 재출간되어 나왔다. '톨스토이 동화집'이라는 표지의 글이 눈에 거슬리지만 친절함에 대한 과도한 강조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중간에 들어간 삽화도 나름 보는 재미를 더했다. 그러나 함께 이 책을 읽은 '연필과 책갈피' 친구들은 원성이 높았다. 재미없다며 불평이 가득했다. 이미 읽어본 이야기인 데다, 뻔한 교훈이라 아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단다. 게다가 강하게 드러난 기독교적 색채도 반감을 낳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어떤 친구는 '종교충'이라며 비하를... ;;;

 

나이 차이일까?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처음에는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만난다는 반가움 보다는, 성급한 결말과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명쾌한 교훈들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책 전체를 읽으며 이 낡은 이야기가 가진 묵직함을 맛볼 수 있었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무언가 성스런 이야기를 읽는다는 기분?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한 친구는 이 책은 어른들이 좋아하는 책이란다. 그러면서 자기 같은 청소년들에겐 전혀 쓸모 없는 책이라고. 도덕 교과서 같은 책이지만 그래도 한번 읽는 건 나름 재산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바보 이반의 이야기》에 실려 있던 '항아리 알료샤'와 '첫 슬픔'이라는 두 작품이 좋았다. 함께 책을 읽은 친구들도 이 두 이야기에 제법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요즘 말로 하면 '발암 유발자'라며 격한 공감을 표했고, '첫 슬픔'은 교훈 없이 상실의 감정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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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산책 동양문화산책 5
주백곤 외 지음, 김학권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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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을 공부하는데 가장 좋은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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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에서 발견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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