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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수유너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도 만화 때문이었다. 예전 원남동 시절 한 층을 카페로 썼는데, 그 카페의 한쪽 벽은 CD와 LP로 가득 차 있었고, 또 한쪽은 만화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만화방에서나 보던 이중 책꽂이로. 만화의 불모지에서 자랐던 나는 그곳에서 한풀이했다. 물론 '너는 와서 만화만 보냐?'는 핀잔에 곧 고전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전에도 만화를 즐겨보는 편이었다. 그러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연구실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동시에 나오키의 《몬스터》와 《21세기 소년》을 만났고, 《베르세르크》와 《기생수》 따위를 읽을 수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쥐》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후 기회가 나는 대로 좋은 만화를 찾아보고 있다. 최근에 읽은 만화(?)로는 데츠카 오사무의 《붓다》가 인상 깊었다.
내년 청소년 강의를 준비하면서 만화를 찾아보았다. 매년 1-2월 강좌는 좀 가벼운 텍스트를 선택하는데, 만화 - 웹툰 - 애니메이션 순으로 진행했다. 이제 다시 만화를 볼까 하는 생각에 여러 작품을 찾아보았다. 그중 위 두 작품도 접하게 되었다. 《앨런의 전쟁》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재와 다른 사람의 실재 경험담을 작가가 만화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쥐》를 떠오르게 했다. 작가 기베르는 휴양지에서 주인공 앨런을 만나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곧 만화로 그려낼 생각을 한다. 마치 슈피겔만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차이가 있다면 작가는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독자는 오직 앨런의 이야기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의 끝자락을 경험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의 전개가 단순하다.
다른 실망스러운 점은 몹쓸 기대감 때문에 벌어진 것인데,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라 하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떠올리곤 한다. 아니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살벌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그러나 아쉽게도 앨런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전쟁의 끝자락에 투입되어 종전 이후에 벌어진 몇 사건들을 경험했을 뿐이다. 《전쟁의 앨런》이라지만 '전쟁'을 만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예외상태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연의 무엇을 기대했던 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전쟁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지낸 이야기들은 따분했다. 한 개인의 과거사라는 점에서는 따듯한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에식스 카운티》는 어쩌다 책 소개를 읽게 되었는데, '천재적 작가'라는니 '캐나다의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느니 하는 찬사에 솔깃했다. 책을 구해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두꺼웠고, 속지도 꽤 두툼하여 뭔가 거친 느낌을 줬다. 흑백의 그림과, 거친 스타일로 만화를 읽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일본 소년 만화를 보다 그래픽 노블을 보면 보통 정적이라고 느끼곤 하는데, 그것은 칸의 배열과 대사의 흐름이 마치 소설처럼 일정한 흐름을 갖기 때문이다. 《에식스 카운티》역시 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커다란 그림과 굵직한 인물들의 얼굴 묘사가 있어 그림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
서문을 통해 알았는데 캐나다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다른 하나는 세스의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였다, 《스콧 필그림》은 그냥 표지만 훑어본 정도였고. 세스의 작품과 르미어의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외로움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다.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무엇인가 결여된 삶을 살고 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삶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울한 이야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별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우울한 개인의 하소연을 듣는 듯했기에. 부연하면 그 외로움이란 오직 외로운 이들과 공명할 수 있는 것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