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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묘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31 ㅣ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31
김인 지음 / 새만화책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콘테는 연필이나 목탄보다 진하고 윤기가 있고 무른 결점이 있지만 빛과 음영의 변화나 양감과 공간 관계를 표현하는 데 더없이 적합한 미술 도구라고 한다. 《그림자 소묘》는 보통 펜과 스크린 톤으로 그려지는 다른 만화들과는 달리, 바로 콘테와 붓으로 그려졌다. 그만큼 책 속에는 음영도 많지만 빛 또한 풍성하다. 그늘이 드리워져야 할 곳들에 제대로 짙은 음영이 묘사되어 있어, 빛이 그토록 눈부신가 보다.
《그림자 소묘》는 〈내 마음의 지도〉와 〈그림자 소묘〉 두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빛처럼 밝고 부드럽고 질박한 시골 소녀 ‘주희’와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투명해진 서울깍쟁이 소녀 ‘정원’의 따뜻한 우정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내 마음의 지도〉에서 늘 길을 잃고 헤매던 주희는 ‘내 마음의 지도’를 완성함으로써, 〈그림자 소묘〉에서 정원은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게 된 주희와 ‘주파수’를 맞춰가면서 잃어버린 그림자를 되찾고, ‘서울’이라는 현실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든든히 새겨 넣는다.
여기에서 콘테와 붓이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다. 명암과 질감이 뚜렷하게 그려지는 콘테는 정체성의 회복을, 투명하게 그려지는 붓은 정체성의 상실을 표현한다. 〈내 마음의 지도〉에서 주희는 콘테로, 주희에게 낯선 서울은 붓으로 그려졌으며, 〈그림자 소묘〉에서 정원은 붓으로 그려지다가 주희를 만나는 순간부터 콘테로 그려졌다. 콘테의 명암과 질감은 주희와 정원, 그리고 서울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두 단편 중에서 〈내 마음의 지도〉는 만화가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내 깊은 그리움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내 마음의 지도〉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주희가 막내이모를 따라 그림 공부를 하러 서울로 상경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짙푸른 숲과 들판이 있는 곳에서 시시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한가롭고 평화롭게 자란 주희는 ‘길바닥이 숫제 사람 머리통으로 새까만’ 서울에서 걸핏하면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이다. 주희는 그 많은 ‘번듯한 미술 학원’ 다 두고, ‘구들짝에서 귀신 나게 생긴’ 허름한 화실이 마음에 쏙 든다. 화실 앞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강아지풀에까지 물을 주는 화실 선생님의 모습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희에게는 화실 가는 길을 익히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주희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있었으니, 황량한 서울 바닥에서 양옥집 대문 위에 자라는 상추, 전깃줄을 따라 덩굴을 뻗은 호박, 어느 집 앞 화분에 심어져 있는 토란, 주차장에 서 있는 오동나무 등등이었다. 주희는 그것들을 따라 이정표를 세우며 화실까지 가는 ‘내 마음의 지도’를 만든다.
그 지도 안에서는 주희의 눈에 띈 상추며 호박, 토란, 오동나무 등등이 실제보다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지지만, 그 대담한 구도가 〈내 마음의 지도〉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이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근원적인 ‘고향’의 자연이 그리워진다. 각박한 시간 속에서 마법처럼 진한 향수(鄕愁)에 젖어들게 된다. 시골 우리 집에 있는 석류 나무, 자두 나무, 배 나무, 단감 나무, 복숭아 나무, 포도 나무, 그리고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 또 우리 집에까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옆집 모과 나무가 그립다. 어디 그리운 게 한둘인가. 우리 엄마 젖가슴도 무지 그립다. 또 내가 우리 집에 갈 때마다 바뀌어 있는 누렁이들도 너무나 그립다. 주희의 ‘내 마음의 지도’는 내 영혼이 진정으로 머물고 싶어하는 곳까지 무수한 그리움의 발자국을 찍어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