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알렉산더 페히만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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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기계’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반 도젠 교수를 창조한 추리소설 작가인 잭 푸트렐의 미발표 원고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 그뿐이랴, 과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로 소실된 70만 점의 문서, 작가 개인적인 이유로 스스로 태워버리거나 도둑맞은 미발표 작품들, 자연에 의해 훼손되거나 강제로 폐기된 책들. 이런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책들을 모아놓은 도서관이 바로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이다. 얼마나 환상적인가. 이 도서관에 발을 디디면 다양한 역사와 문화로 안내하는 말단 사서에 의해 신화로만 전해지는,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이 도서관은 그 실낱같은 개연성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도서관은 상징적인 존재이다. 단순히 텍스트만을 보관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기술로 얼마든지 압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만으로 절대 느낄 수 없는 시간과 문화가 책 표지에, 책장 사이사이에 녹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내하는 사서가 관리하는 도서관이 필요한 것이다.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은 특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책들이 존재하는 곳이어서 더욱 상징적이다.

하지만 현재 살아남은 책들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개인과의 개연성이 없는 책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자. 서점에도, 도서관에도, 심지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도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나와의 개연성을 찾지 못하는 한 존재하지 않는 책들이다.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책들은 물리적인 이유뿐 아니라 내가 읽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내가 읽었을 때 그 책은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 『심판』은 내게 존재하는 책이지만 『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미로는 독서는 그 책을 존재하게 해주는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닐는지.

책에는 언제나 나이만큼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져 누렇게 변해 버린 책,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우연히 접하게 된 책, 막 구입한 새하얀 느낌의 책, 이런 책 모두가 그만큼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몇 십 년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이름을 이어갈 책도 있을 테고 당장 내일이면 사람들에게 잊혀져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결국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책들도 있을 것이다. 읽고 싶어서 구했지만 구석에서 먼지만 쌓인 책들이 보인다면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책장을 넘겨보라. 이제 그 책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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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사 오디세이
쓰지 유미 지음, 이희재 옮김 / 끌레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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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국 문학을 더 많이 읽는 편독 습관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늘 ‘번역’의 문제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 원어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이상 ‘오역’을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닌지라, 내가 분노하거나 짜증을 주체하지 못할 때는 도통 우리말의 기본 문법도 지키지 않은 비문들이 가득해 문장 하나하나뿐만 아니라 앞뒤 맥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다. 그럴 때는 번역자가 자신의 번역을 한 번이라도 다시 읽어봤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래도 꾹 참고 대강의 뜻만 짐작하며 겨우겨우 읽었는데 그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면 정말 오호통재라. 이렇게나마 읽게 해준 번역자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당신 아니면 다른 번역자가 이보다는 더 낫게 번역했을 거라고 원망해야 할지 헷갈린다. 감히 원어 고유의 미묘한 뉘앙스를 완벽하게 전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책의 이야기를 여유롭게 음미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식욕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독서법을 제시하면서 “번역서는 오역이나 나쁜 번역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번역서를 읽다가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머리가 나쁘다고 자책하지 말고 우선 오역이 아닌지 의심해 보라”고 말했다. 즉 난해한 번역서는 오역 혹은 나쁜 번역임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그 이후로 나는 문장이 잘 통하지 않고 앞뒤 문맥이 어울리지 않으면 무턱대고 ‘나쁜 번역’을 의심했다. 감히 ‘오역’을 의심하기에는 역시 원어에 자신 없거나 조금도 알지 못하니 그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번역에 대한 내 기대와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서의 정확한 의미가 통하는 올바른 우리말 문장은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고, 책의 내용에 따라, 작가의 시대에 따라 문체가 다소 달라지긴 하겠지만(거의 느껴본 적 없지만), 의미 해독에는 별 어려움 없어도 우리말 문장이 너무나 촌스러우면 그것도 읽어내기가 여간 고역이 아닌 것이다. 16세기 프랑스 시인 조아샹 뒤 벨레가 주장한 것처럼, “언어에는 그 나름의 고유성이 있기 때문에 번역을 해놓으면(좋은 번역, 나쁜 번역을 막론하고 일단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놓으면-※나의 사족) 원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은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독자인 내가 모든 언어에 통달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원문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사라져도 번역가가 없으면 나는 그 이야기도, 그 작가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번역가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게, 또한 크게 생각한다. 나는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눈으로 들어와 머리로 재해석하기 시작하면 작가의 작품은 이제 별개로 독자의 작품으로 공존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번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번역가가 번역한 원저자의 작품은 온전히 번역가의 작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벨 앵피델Belles Infidèles”의 문제가 불거진다. 벨 앵피델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부실한 미녀’인데 ‘아름답지만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촌스럽지 않은 번역문, 세련된 번역문, 좀더 잘 읽히는 번역문을 원한다고 해서 번역가가 임의로 원서에 없는 수식어나 내용을 덧붙이고, 또한 원서에는 버젓이 있는 난해한 문장을 빼버리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단은 불가피하게 번역을 통한다고 해도, 그 한계 속에서 원래 작품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독자에게서 완벽하게 박탈하는 것이다. 원문에도 충실하고 번역문도 아름다운 균형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잘 안다. 그러나 당신이 번역가인 이상 가장 이상적인 번역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당신의 번역문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읽는 나도 역시 더 나은 번역을 자꾸만 기대해도 되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번역가가 자신의 번역을 작품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프랑스어 번역가인 쓰지 유미의 『번역사 오디세이』는 프랑스 번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보편적인 번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에게 좀더 가까이 있고자 쌓아올린 바벨탑이 무너져 하나의 언어였던 것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언어들로 흩어진 이래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정확하게 잘 옮기는 일은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번역에 대해 거듭 고민하는 문제들은 먼 과거에도, 먼 미래에도, 지구 곳곳에서 계속 제기될 것이다. 신이 서로 알아들을 수 없도록 흩어놓은 무수히 많은 언어들을 하나의 언어로 다시 모으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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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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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악(惡)'은 개념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실 '악(惡)'을 개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유'를 개념화하기 어려운 것과도 같다. 일례로 원시부족에서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행위이지만 그들 부족에게는 더없이 신성하며 '선(善)' 행위이다. 이처럼 '악(惡)'은 개념화하거나 정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악(惡)'은 사람들이 인식하는대로 존재하며 일관되지 않다. 모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들처럼 '악(惡)'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정의도 개념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적이며 즉각적, 실존적으로 '악(惡)'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 <데블>에서 악의 역사를 살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데블>에서는 이런 '악(惡)'을 고대사회부터 원시기독교시대까지(전 4권중 첫번째 권이다) '악(惡)'의 의인화부터 시작된다. 사실 '악(惡)'의 시작은 하나였다. 일원론적 차원에서 '선(善)'과 '악(惡)'은 하나였으며 고대의 신들은 두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파괴와 생명을 주는 칼리나 자웅동체(주로 선한 남성성과 악한 여성성을 가진다)의 예를 보아도 고대사회에서의 '악(惡)'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일원론적 선악관은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선(신)'에 대한 완벽주의 덕분에 변화를 맞게 되었다. 사실 이는 종교의 활성화된 모습과 함께 이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혼돈된 모습의 신보다 절대선의 신이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렇듯 이원론적 관점에서는 '선(善)'에 대한 '악(惡)'의 모습은 여러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원론은 영혼(선)과 육체(악)로 분리했으며, 일반적으로는 선에 대립하는 악의 존재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유대교,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악(惡)'은 고대의 신의 다른 모습에서 점차 독립적인 개념, 즉 악마의 모습으로 구체화되게 된다. 이렇게 구체화되고 형상화된 '악(惡)'은 개념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악마는, 또는 '악(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구체화되고 이미지화-인간의 모습을 한 흉칙한 외형, 뿔, 박쥐형태의 날개 등-된 '악(惡)'의 모습이지만 우리 주위의 '악(惡)'의 모습은 여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이미지화된 악은 사실 우리 도처에 있다. 흉칙한 '악(惡)'의 모습은 영상, 게임, 문학 등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악(惡)'은 우리 모습의 또 다른 면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절대선의 모습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악(惡)'의 모습은 떨쳐내어야 하겠다. 모든 의미가 왜곡되고 변형되어 '악(惡)'한 모습도 멋지게 포장하는 요즈음이라면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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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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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의 표정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의 모순 가득한 이야기를 공감하노라면 내 마음은 즐거운 연민으로 가득 찬다. 그 연민은 완전한 선함으로 무장하고 지상의 인간이 감히 범접지 못할 거룩한 신성으로 멀찌감치 경외로운 거리감을 두는 유일신을 마주하고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하는 풍요로운 감정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지고지순의 사랑을 후광으로 드리우고 선악을 판단하는 서늘한 잣대를 들이대는 완전한 신 앞에서 인간의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 안에서라면 전혀 달라진다. 신들은 인간보다 더 자신의 감정에 기대어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사랑과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신들과 인간들이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 함께 엎치고 뒤치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증오한다.

이윤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권》에서 “사랑의 테마로 읽는 12가지 열쇠”라는 부제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잃어버린 반쪽이’를 찾는 ‘사랑’의 과정으로 여러 사랑의 원형을 제시해 준다. 즉 여기에서는 ‘누구를 자신의 반쪽이로 구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그에 따라 사랑의 결말도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무수한 사랑 이야기 중에서 ‘동물과의 비정상적인 사랑, 의붓아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계모의 사랑, 친오라비와 친아비를 향한 사랑, 남성 간의 동성애, 여성 간의 동성애, 동성 부모를 미워하고 이성 부모를 좋아하는 딸 아들의 무의식적인 사랑, 처제에게 욕정을 품은 형부의 사랑,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기애, 매춘부와의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비극적인 원형을 보여준다. 이윤기는 이런 사랑들만 금기하면 모두 행복한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가장 근원적인 감정에 기댄 사랑이기에 그 파국도 모두 극단적이라는 것을 안다. 물론 이윤기가 비극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사랑 이야기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양성 체험’이라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흐뭇한 결실을 맺는 사랑으로 과실의 여신인 포모나와 계절의 변화를 상징하는 베르툼누스의 이야기를 들려주긴 한다. 그래도 그가 시종일관 눈앞에 그려주는, 피가 낭자하는 어두운 터널 같은 사랑에는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커밍아웃에 대한 일관적이지 못한 발언이나 매춘부를 포함한 서슴없는 여성성 비하는 계속 거슬렸다. 반쪽이를 이성에게서 찾는 것이 건강하다고 커밍아웃을 비웃던 그가 아폴론과 히아킨토스나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동성애를 다루면서는 살짝 한발 물러난다. 거대한 매음굴인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 즉 매춘부를 반쪽이로 사랑한 레안드로스의 파멸을 당연한 귀결이라고 못 박는다. 남편 제우스의 바람기에는 관대해도 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헤라의 질투와 복수에 대해서는 정당하지 못하고 질책한다. 아름다운 여성을 꾀어내는 남신들에게는 관대해도 수려한 남성을 유혹하는 여신들에게는 음탕하다고 비판한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권》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에서 부족했던 주제의 힘이 보완되어 완결성 있는 책이 되었지만, 이윤기의 균형 있는 시각이 절대적으로 아쉬운 책이 되고 말았다. 나의 개인적으로 취향으로, 행복한 사랑의 원형도 슬픈 사랑의 원형만큼 보여주길 바라는 것까지는 다소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이윤기는 ‘들어가는 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통해 인류의 ‘잃어버린 반쪽이’ 찾기의 건강성이 어떻게 회복됐는가에 중점을 두었을 수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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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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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책이 있었다'

현 시대에서의 책은 그 존재 가치가 너무 희미해졌다. 어디에 가나 책은 널려 있으며 어디서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게다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도 변화되어,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읽는 것에서 이북(E-BOOK)이나 텍스트 파일에서 전자 기기로 읽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또한 책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컴퓨터와 프린터만 있으면 누구라도 개인의 책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태초의 책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대량 생산품이 아니었다. 고급의 양피지나 파피루스는 비쌌고 일일이 필경사에 의해 한 글자씩 기록되었다. 또한 채경사들에 의해 삽화는 정밀하게 그려졌다. 어떤 책, 어떤 페이지도 같은 것이 없었다. 책 자체가 예술품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했으며 그만큼 비쌌다.
이런 귀한 예술품 같은 것이었기에 책은 귀족,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며 애서가, 장서가의 등장은 그만큼의 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늘 그렇듯이 최초의 도서관은 종교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독서 자체가 수도원에서 행해졌을 뿐 아니라 책의 귀함은 고귀한 종교적 행위를 기록하기에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학의 발달로 대학 도서관의 존재가 커지게 되었으며 책의 수요도 더욱 늘어나고 책을 공급하는 상인들의 등장은 책의 보급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책을 읽는 방식의 변화도 이러한 책의 증가와 더불어 바뀌게 되었다. 낭독이 문맹자들이나 책을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적인 행위에 가까웠다면 묵독은 종교적, 학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학의 발달은 책의 학문적인 이용뿐 아니라 양적인 증가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물론 책 도둑의 문제가 중세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책은 화려하다. 지금도 화려해 보이는 책들이 많지만 중세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필경사의 한 글자에 매달린 노력뿐 아니라 머리글자의 장식, 책의 여백을 이용한 그림들과 삽화에 이르기까지 당시 채경사들에 의한 미술적인 요소들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그야말로 책은 종합적인 예술작품이었다.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예술작품들.

요즘에도 책이 장식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중세나 지금이나 책을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부유한 계층들이다. 이름뿐인 서재에 꼽힌 전집류나 사전류들은 그저 장식품일 따름인데, 그렇게 대량 생산된 복제품-문자 그대로의 복제를 의미한다. 어떤 것이라도 동일한 물건인-을 뿌듯하게 바라만 보는 장식품이다. 같은 책이어도 세상에 한 권뿐이었던 중세의 책들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는 없다.

사실 현대에 와서 책의 예술적 가치는 소멸했다. 지금 중세 그대로의 책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책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책은 읽히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예술적인 가치는 없더라도 정신적인 가치는 여전히 존재-아닌 것도 많지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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