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단련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고양이 빌딩’이라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엄청난 서고를 보며 부러워했지만 그가 독서에 관한 책에서 밝힌 픽션 무용론을 보면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실용적인 독서, 정보의 습득과 축적을 위한 독서를 강조하고 자신의 흥미에 맞는 책만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픽션을 거부한다. 이른바 지적 생산형 독서로 책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습득해야 하고 재생산을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상상력과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치바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한다. 내가 고양이 빌딩을 세운다면 4층 중 3층은 픽션으로 채울 것이다. 

이런 다치바나가 『지식의 단련법』을 통해 정보를 수집, 분류하고 생산하는 과정을 들려 준다. 1984년에 처음 나온 책이니 지금 본다면 그 방법론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 저널리스트로서 다치바나의 지적 생산의 기술-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아니 그의 방법론은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시대인 요즈음에 더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자료를 오리고 스크랩하는 과정은 가위에서 마우스로 변한 차이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색인과 차례는 네트워크의 하이퍼텍스트와 검색엔진으로 대체되었으며 정보를 검색하는 행위 또한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정보를 모으는 도구가 아니라 정보의 가치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이른바 정보의 바다, 정보의 쓰레기라고 불리는 네트워크의 정보과잉 속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지혜를 과거의 방법론을 통해 현대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요즈음도 국어책에 실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하윤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이 있다. 자신에게 떠오른 시문이나 여러가지 생각들을 광적으로 메모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는 다치바나의 실용적 정보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정보를 수집하고 입력하는 과정과 별다르지 않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굳이 출간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정보를 출력할 수 있는 여건은 네트워크에 널려 있다. 블로그나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것도 정보를 출력하는 것인데 그 과정이 너무 손쉬워진 탓에 정보의 입력과정을 생략해 네트워크의 쓰레기들이 양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다치바나의 정보입력의 방법론에는 전부를 동의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는 입력에 의해 축적되고 형성된 풍요롭고도 개성적인 지적 세계야말로 좋은 출력의 토양이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 가치를 파악하고 왜곡된 정보를 가려 내는 것과 같은 자신만의 방법론을 찾기 위해서는 역시 그의 말처럼 좋은 문장을 많이 읽고 우직하게 발품을 팔아 조사하는 것, 잡념을 떨쳐 내고 정신을 집중해 눈 앞의 문장을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다. 굳이 정보를 재생산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
빈센트 반 고흐 지음, 박은영 옮김 / 예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잔혹극의 선구자인 앙토냉 아르토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을 “꺼지지 않는 불길, 핵폭탄, 생생한 살덩이, 알갱이 하나하나를 모두 드러낼 분자들의 유성 폭격, 진정한 삶의 오브제가 울려 나오는 영원히 초인적인 음색,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 독보적인 자연의 재현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뿌리째 뽑아낸 소용돌이치는 힘의 분출을 목적으로 하는 회화”라고 극찬했다(※『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반 고흐가 여전히 우리를 진하게 감동시키는 이유를, 앙토냉 아르토가 반 고흐와 그의 그림에 보내는, 시원한 대포 소리만큼 강렬한 찬사의 언어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점의 가식도 허용하지 않는 청청한(실금만 가도 ‘쩡!’ 하고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영혼의 팽팽한 시선으로 그려낸 삶의 핵에 가 닿는데 마음이 울지 않을 삭막한 심장이 있을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2』는 반 고흐가 자신의 천분이라고 믿었던 성직자의 길 대신 늦깎이 화가로 생을 다시 시작했던 1881년 이후 5년간 동시대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와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아낌없이 불사르며 “오후 두 시에 내리비치는 태양의 작열하는 진실”을 화폭으로 옮긴 반 고흐의 예술가적 면모는, 쉼없이 그린 그의 그림들뿐 아니라 평생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와 동료 화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700여 통의 편지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늘 삶의 진실, 자연의 진실과 담대하게 마주했던 그의 타협 없는 섬세한 감성은 역시 가식 없이 올곧고 투박한 편지 문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근사한 말들로 장식하지 않아도 진실만을 소박하게 담고 있는 문장들은 그의 그림처럼 마음을 뒤흔든다.

안톤 반 라파르트와 주고받은 편지들에는 성직자에서 화가로 인생의 전환기에 선 화가의 고뇌와 새로운 결심, 화가로서의 자기정체성과 양심, 그리고 희망, 천재성이 무르익어가는 열정, 예술에 대한 강직한 신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엇보다 하층민들을 바라보는 진솔한 시선은 너무나 따뜻하여 눈물겹다.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모든 힘을 남김없이 폭발시킨 듯한 강렬한 붓질의 전성기 그림들이 탄생하기까지 무수히 시도해 본 초기 그림들은 색채가 어두워도 반 고흐의 인간적인 연민이 고스란히 묻어나 아름답다. 정규 교육의 형식적인 허식에 물들지 않은 자만이 담아낼 수 있는 화폭들은 진솔한 눈부심으로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성직자로서도, 화가로서도 늘 죽을 힘을 다해 살았다. 화가로 두 번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에는 더욱 그랬다. 그의 열정적인 신념은 신앙이 되어 그를 삼켰고 이제 나를 삼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
이주향 지음 / 시작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주향 철학교수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성서를 포함한 고전 명작 속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사랑’을 다양한 테마로 다각도에서 변주한다. 달콤한 명상적 문체로 사랑이 발휘하는 위대한 영향력을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 짧은 글으로 깊은 사색을 이끌어낸다. ‘철학’을 하는 사람의 책답게 문장 하나하나 곰곰이 돌이켜보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래서 금방 읽어낼 줄 알았던 책을 오랫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열다섯 명의 커플들을 3개월에 걸쳐 촬영하여 15컷을 하나로 만든” 김아타의 사진(※표지사진)처럼, 이주향 철학교수도 모두 31편의 명작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지만 결국 근원적인 ‘사랑’로 통하는 서른세 쌍의 남녀를 찾아내어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염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은 태초의 사랑 하나를 형상화한다. 그녀가 원래 사랑은 이래, 라고 황홀하게 들려주는 순결한 사랑의 고귀한 모습은 감히 난 그를 사랑해, 라고 입에 담기가 무안할 정도이지만, 태초 이래 가벼운 사랑의 빈말들이 난무하는 오늘날까지도 사랑이 삶의 주제, 철학의 주제, 예술의 주제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은 사랑의 깊고도 무겁고 핵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인간과 동물, 식물, 자연을 끌어안고 있는 대지의 중력처럼 태초의 사랑도 핵을 지녀 가벼운 사랑이든 무거운 사랑이든, 진실한 사랑이든 거짓된 사랑이든, 솔직한 사랑이든 편견 가득한 사랑이든, 세상의 모든 사랑을 끌어당겨 정화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사랑’이 난무해도 사랑 본연의 아름다운 힘을 잊지 않도록.

『사랑이, 내게로 왔다』에서 가장 재미있게, 흥미롭게 읽었던 꼭지들은 역시 내가 읽은 적이 있고 좋아해 왔던 커플들의 사랑을 들려주는 부분들이었다. 특히 진 웹스터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애버트와 저비 스펜들턴,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의 제인 에어와 에드워드 로체스터,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J.R.R. 톨킨 『반지 제왕』의 톰 봄바딜과 금딸기 이야기. 이주향 교수의 사랑 접근법으로 재해석되는 그들의 이야기는 새로움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사랑이, 내게로 왔다』는 커플들 중 대체로 여성과의 가상 인터뷰가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주향 교수의 질문에도, 명작 속 여성의 대답에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그녀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대로) 느껴진다. 잡지 마감을 위해 글을 위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끼며 보듬고 어루만져온 보석 같은 커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풀어냈다는 것을 느낀다. 글로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진심이 아니었다면 아마 독자도 빛만 좋은 글에 공감하지 못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즈버드 - 그 사람의 1%가 숨겨진 99%의 진심을 폭로한다면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효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워낙 집 밖으로 외출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에게 낯선 것 중 하나는 영화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해서 책도, 드라마도 환장하면서 유독 영화에만 열을 올리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거나 비디오 대여점에 가려고 집 밖에 나설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아서다. 당연히 이 책의 제목 ‘로즈버드’의 기원이 된 유명한 영화 '시민 케인'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피에르 아술린의 진짜 의도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의도가 책 제목 <로즈버드>에 제대로 구현됐든 그렇지 않든.

"한 사람의 본질을 폭로하면서 그간의 편견과 인식을 배반하는", 놀랍기 그지없는 가장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사소한 것, 그것이 영화 '시민 케인'에서도 피에르 아술린의 이 책에서도 바로 '로즈버드'로 통한다. 누구나 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활짝 핀 장미'가 아니라, 아무나 알아보지 못하지만 곧 활짝 피어날 '장미 꽃봉오리'처럼. 한 사람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중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끈질기게 빛을 잃지 않고 그 사람을 감싸는 단 하나.

피에르 아술린은 책에서 <정글북>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한때 영국 왕세자빈이었던 다이내나 스펜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장 물랭, 20세기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 유대인이지만 평생 독일어로 시를 지은 파울 첼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까지 그들의 로즈버드를 발견하여 화려하게 조명받는 외면에 가려진 이면의 진실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피에르 아술린이 독자들에게 내미는 '로즈버드'가 그의 의도대로 얼마나 '로즈버드'로 받아들여질지는 사실 의문스럽다. 그는 문학적이고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고 다분히 주관적인 태도로 자신이 선택한 인물들을 부각시킨다. 간혹 자신이 그 인물들보다 더 돌출되기도 하면서. 하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어떤 평전 혹은 전기보다 독특하고 생생하다. 무엇보다 파울 첼란의 로즈버드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르메르의 모자 - 베르메르의 그림을 통해 본 17세기 동서문명교류사
티모시 브룩 지음, 박인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티머시 브룩은 『베르메르의 모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베르메르의 매혹적인 그림에 17세기 문물 교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았다. 티머시 브룩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그것도 베르메르의 그림에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티머시 브룩이 말했듯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동서양의 문물이 왕성하게 교류되었다는 역사적인 배경 지식은 제쳐두고,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의 특징만 살펴봐도 그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신화적, 종교적, 역사적 의미나 상징 없이 온전히 인간의 일상생활에 집중한 장르화(genre, ‘일반적인’ 혹은 ‘전형적인’이라는 뜻의 ‘générique’에서 기원한 미술 용어-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들이 많이 그려졌다. 일상생활을 회화로 옮겨도 충분히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당연히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쓰였던 가정용품을 비롯한 다양한 물건들이 그림 곳곳에 등장한다.

게다가 그 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베르메르는 평온한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위해 그린다기보다 자신의 그림이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 있도록 일상생활의 평온한 정경과 오브제들을 배치하고 빛과 그림자를 고려하여 너무도 꼼꼼히(?) 그렸다. 그것도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값비싼 물품들을 자신들의 실내로 기꺼이 들여올 수 있는 상류층 사람들의 일상을 말이다. 티머시 브룩이 주목한 비버 펠트 모자, 진주 귀고리, 중국 도자기 접시, 은화, 세계 지도 등은 그들의 일상 속에서 조금도 간과되지 않고 똑같은 중요성을 지닌 듯 반복적으로 그려졌다. 마치 그림을 위한 소품들로 애용한 듯 그의 그림들에서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티머시 브룩의 17세기 네덜란드의 동서양 문물 교류사를 이야기하는 데 꼭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크게 상관없었을 것이다. 제목에 화가 ‘베르메르’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베르메르’와 ‘베르메르의 그림 읽기’에 초점을 맞춘 예술서라는 오해를 하지 말길 바란다. 티머시 브룩의 『베르메르의 모자』는 17세기 네덜란드, 더욱 확장하여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지역)와 “단절 없이 이어진 세계”의 역사서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오브제들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데 작지만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열쇠가 되어주는 동시에 흩어진 역사를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조합하는 윤활유가 되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